싱가포르에서의 크리스마스
연중 내내 여름인 나라에 살면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지만, 마음의 준비도 없이 들이닥치는 무슨 무슨 시즌이 되면 웬 시간이 이렇게 빠르게 흐르나 싶다.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해 두꺼운 옷을 준비하다가 붕어빵이 생각나면 아, 이제 곧 연말이구나,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크리스마스트리는 언제 꺼내놓지? 하는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 없이 크리스마스가 말 그대로 눈앞에 훅, 갑자기 놓이는 것이다.
싱가포르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을 가장 실감할 수 있는 곳은 마트다. 마트는 어찌나 부지런한지 핼러윈이 끝나자마자 장식이 보라 주황색에서 빨강 초록으로 바뀐다. 화려하기만 하고 조잡한 장식을 보면 그렇게 들뜨는 기분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크리스마스 버전 초콜릿을 장바구니에 담게 된다. 겉 포장에는 크리스마스 에디션이라 하여 산타나 눈 쌓인 풍경들이 그려져 있지만, 막상 뜯어보면 원래 팔던 초콜릿과 꼭 같은 초콜릿이다. 한두 달 반짝 판매하는 시즌 상품이 재고로 쌓이면 안 되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겠지. 주제넘게 대기업 입장까지 고려해 주는 나는 정말 착한 소비자다.
명품 매장으로 가득한 오차드 거리에 나가면 제법 고급스러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대로 전체가 반짝반짝한 장식과 캐럴로 가득하다. 밤에 나와 보면 환상적이게 느껴지기도 한다. 쇼핑몰의 명품 매장들은 경쟁하듯 크리스마스 장식을 뽐낸다. 어떤 진열장은 예술작품같이 멋져서 평소 같으면 그냥 스쳐 지나갔을 매장 앞에도 멈춰 서게 된다. 최고의 디자이너들이 이 공간을 어떻게 꾸밀지 오랜 기간 고민한 뒤 실현시켜 둔 것일 테다. 마트의 그것과는 질이 다르다. 창의적이고 아름다우면서도 크리스마스 시즌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그걸 바다보다 보면 시계도, 가방도, 구두도 아름다워 보인다. 하지만 마트에서 처럼 기분 내자고 하나 담아갈 수는 없다. 마트의 그것과는 가격이 다르니까.
쇼핑몰 밖으로 나오자 오차드 거리의 장식들이 이렇게 외치는 것 같다.
"돈 써!!!!!!!! 그래야 진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것이라고!!"
갑자기 이 모든 게 경박하고 노골적으로 보인다.
크리스마스는 본래의 의미를 잃고 소비파티가 된 지 오래다.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던 어린이들은 산타 선물에 목을 매고, 어른들은 먹고 마시고 선물하는 일과 그것을 전시하는 일에 온 정신을 판다. 크리스마스뿐 아니라 모든 기념일이 그렇게 돼버린 것 같다. 돈이 가장 쉽다는 말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쓸 돈만 있다면 돈 쓰는 게 특별한 날을 기념하고, 마음을 전하고, 기분을 내기 가장 쉽고 편한 방법인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길들여져 왔다. 그렇지만 그것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느끼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쉽게 전한 마음과 쉽게 낸 기분은 그만큼 쉽게 퇴색된다. 우리는 사람,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주에는 캐럴을 틀어 놓고 아이들과 어드벤트 캘린더를 직접 만들어보련다. 그림을 그리고 색을 칠하면서, 무언갈 오리고 붙이고 묶으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야지. 작년에 그랬던 것처럼 크리스마스트리를 꺼내 가족들과 함께 꾸미고 나면 영화 '나 홀로 집에'를 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그렇게 우리만의 연말 의식(儀式)을 한 해 한 해 쌓아가야지. 물론 아이들의 선물과 성탄 만찬을 빼놓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은 곁들임으로. 메인은 우리가 함께 있는 것으로, 우리 존재들로 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