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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와칼 Feb 09. 2022

나는 인간적이고 싶지 않다


펜싱 장갑을 사러 가는 길에 동물구호단체 홍보하는 분을 마주쳤다. 몇 마디 이야기가 오간 후 그녀는 눈 뜬 채로 벗겨진 호랑이 가죽 사진을 보여주며 말했다.


  값이 더 나간다고 마취도 하지 않고 이렇게 산채로 벗겨내는 거예요.
  네….
  동물 키우세요?
  네. 고양이 키워요.
  몇 마리 키우세요?
  두 마리요.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제리, 아리요.
  그러시구나. 누가 돈 된다고 가족같은 제리 아리를 이렇게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녀의 마지막 말은 나를 괴롭혔다. 그녀가 정말 동물을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있었을까. 내가 그 사람의 부모 이름을 물어본 후, 그들의 이름을 언급하며 호랑이 가죽을 생각해보라고 했다면 불쾌하지 않았을까. 그녀에게 악의는 없었겠지만 내게는 폭력이었다.


그때 마침 나는 인간은 존재만으로도 다른 인간에게 죄를 짓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겐 나의 존재가 그 자체만으로 불편할 수도 있다. 내가 그들을 선의로 대해도 그렇다. 선의는 악의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들과 관계 맺지 않으려 해도 그렇다. 존재만으로. 나의 사랑과 나의 열정만으로도 나는 누군가에게 불편할 수 있다.


스승과 대화할 때면 눈물을 참아야 할 때가 많다. 아마 그건 스승이 비정非情한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감정이 없는 사람은 없으므로, 아마 비정이란 감정을 드러내지 않거나 감정에 덜 영향 받음을 수식하는 표현일 것이다. 거대한 감정을 가졌던 사람만이. 그리고 그 감정에 상처 입었던 사람만이 스스로 비정해지고자 한다.

스승은 선수가 승리해도 기쁨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패배한 선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승은 사람들과 관계를 잘 맺지 않으려 한다. 그의 존재 자체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관계를 맺으면 불가피하게 서로 상처를 주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선수를 위해서라면 그 모든 것을 감수한다.


윤리와 감정은 일치하지 않는다. 옳음은 기쁨과 다르고 그름은 슬픔과 다르다. '비정하다'의 사전적 정의는 '사람으로서의 따뜻한 정이나 인간미가 없다'이다. 윤리보다 감정에 비중을 두는 게 인간다운 것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스승을 인간적이지 않다고 할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인간적이고 싶지 않다. '인간적임'의 기준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삶의 중점을 어디에 두냐에 있지 않다. 자신의 존재와 타인에 대해 숙고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삶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 거기에 인간다움이 있다. 나는 자신의 존재 자체로 인해 피 흘려본 사람의 모든 선택은 인간적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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