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쇼핑몰에서 주차장으로 가고 있는데, 서너살 쯤 된 아이와 엄마 아빠의 예사롭지 않은 대화가 들려왔다. 아이는 동전을 넣고 타는 빠방이에 탑승 중이었다.
"아저씨가 오늘은 이번까지만 타는 거래."
내 귀에 들리는 엄마의 음성은 슈렉 고양이의 커다란 눈망울 같았다. 아이 소리는 안 들렸는데 아마 바로 납득하지 않는 눈치였다. 이어지는 엄마 소리.
"정말이야 좀전에 아저씨가 그랬어."
이번에는 슈렉 고양이 눈에 눈물 방울도 송송 맺힌 듯 목소리에 물기마저 촉촉하다. 음, 저 아이는 우리 첫째랑 비슷한 기질인가 보군.
나도 그랬다. 아이와 외출을 하면 늘, 아이를 속이며 설득하는 데 그동안 썼던 머리들보다 몇 차원 더 높은 머리, 잔머리이면서도 기발하고 뭔가 흥미로운데 또 논리적인 그런 머리를 써야했다. 겨우 개발해낸 방법은 고작해야 서너 달 먹히고 나서 또 업뎃을 해야 했던 게 기억났다.
지난 번까지는 미지의 아저씨를 등장시키면 됐는데, 다음번에 또 그 방법을 썼을 때, "아저씨 없잖아"라고 또랑또랑 받아치는 식이었다. 그럴 때면 지난 며칠 사이 이 아이의 뇌 속 시냅스가 막 형성되고 가지도 치고 활발하게 움직이는 건가 싶어 복잡미묘한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러면 이제 한층 더 그럴듯하게 (아이 입장에서) 말이 되는 속임수를 써야 하는 것인데, 아차 하다가는 말릴 수가 있으니 순발력 있게 대응도 해야했다.
그러다가 유치원에 가게 될 때 쯤, 이제 속임수로는 한계가 온 것을 직감하는 날이 왔던 것 같다. 남은 건 진정성으로 승부하기 뿐. '이번에 너무 많이 하면 다음에 하고 싶다는 '희망' '바램' 같은 부푼 마음이 없지 않겠니, 그건 너무 시시하고 안 설레지 않을까?' 뭐 이런 식이었다.
저쪽에서 아이는 여전히 빠방이에 앉아 있고, 그 앞에서 팔짱을 끼고 짝다리 짚고 서서 계속 아이를 향해 말하고 있는 엄마를 보며, 나도 모르게 옛날 일들이 떠올라 웃고 말았다. 생각해보니 이제 나는 그런 어리고 풍성한 사람들이 쓸 만한 낱말들이나 생각들을 따라서 같이 쓰지 않게 된 지 한참이구나 싶어 살짝 슬퍼진 것 같기도 하다.
이날 남편도 엘리베이터에서 어린이를 만났다. 예닐곱 살쯤 된 아이가 엄마 아빠랑 탔는데, 손에서 그림책을 놓질 않고는 혼자서 계속 속삭이는 소리로 읽는 것이었다. 쓱 보니까 한 페이지 당 두 문장 정도 있는 챕터북이었다. 스스로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 도취되어 또박또박 읽어내려가는 소리를 들으며, 남편은 자꾸 뒤를 돌아 아이를 내려다 보았다.
나는 옆에서 그런 남편 얼굴을 봤는데, 아주 오랜만에 보는 아빠 미소였고 그 모습을 보고 나도 웃게 되었다. 물론 지금도 남편은 아이들 얼굴을 보면 순식간에 눈꼬리가 쳐지고 입꼬리가 올라가면서 얼굴 전체가 헐렁해지는 바보 아빠이지만, 손바닥이 나뭇잎 만한 아이를 볼 때 나오는 미소는 확실히 조금 달랐다. 웃지 않고는 배길 수 없어서 터져 나오는 환한 웃음 같은 것이었다.
우리 동네에는 어린 아이들이 많지 않다. 어쩌다가 멀리서 유모차가 보이면 반가운데, 가까이에서 보면 거의가 다 반려견을 태우고 있다. 그래선지 오랜만에 아이들을 보면서 행복했던 것 같다. 이 시대 젊은 부부들이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막막한 지 잘 알지만, 그래도 이 어린 아이들의 귀한 그들만의 생명력을 느끼고 행복했던 날, 아이들이 조금 더 많이 태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