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나누는데 필요한 거래_2
(앞에서 받아서) 챗지피티는 개인정보 노출 위험을 실제처럼 기능하는 대인 대화 패턴으로 덮었다. 유저의 언어 선택과 대화 방식을 따라 반응하는 챗지피티의 대응 패턴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알아주는 친밀감으로 이끈다. 우리가 AI를 ‘찐친’ ‘멘토’로 여기게 된 데는 온전히 수용받는다는 느낌이 한 몫한다. 이처럼 AI는 모르는 게 없는 시스템 그 자체로서 아니라 사람보다 더 사람같이 느껴지기에 현대인들의 애착 소울 메이트 됐다.
챗지피티에 우울감을 토로한 경험이 있다면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한 적이 있을 거다. 심리 상담을 하는 이들은 챗지피티의 구조화에 감탄한다. 우선 따뜻한 언어와 문장으로 공감해 준 후 해결 방법을 제안하고, 한 단계 더 나아가 해결 방안을 실행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자료들까지 찾아준다. 이 과정 전체가 1, 2분도 걸리지 않는다.
챗지피티는 힘든 감정 호소를 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정서적 공감, 문제 해결 방식, 실질적인 실행 방안, 이 세 가지를 명료하게 제안한다. 무엇보다 이 과정이 아주 빠르게 진행된다. 유저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최적화된 완제품 상태로 바로 지금-여기에서 제공한다. 유저들은 이를 받아 든 순간 실제 실행 여부에 무관하게 만족감을 경험하고 마치 문제가 해결된 듯 안도한다. 정보 검색과 확인이 전부지만 뇌의 혼란은 잦아들고 마음의 무게가 덜어진다. 실제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상황이 종결된다. 일시적 종결일 뿐이지만 순간의 안도감이면 충분한 거다. 이 모든 대응 시스템의 시작이 공감 반응이다. 공감 반응으로 유저들의 마음을 안도하게 한 후 제공한 정보들이게 더욱 신뢰를 준다.
결국 인간적인 접촉이 챗지피티가 인간과 나란히 마주하게 된 이유다. 그런데 우리는 왜 주위에 많은 사람들은 외면하고 핸드폰 속 챗지피티로 대리 경험을 하는 걸까. 완전한 관계를 원하지만, 완전할 수 없는 미완의 관계 변수가 두려운 마음, 불안감 때문이다.
거절의 두려움, 미해결의 두려움, 확산의 두려움, 이런 것들이 우리를 사람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사이버 공간에서는 이 모든 두려움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듯해 안온해지고, 내 고민이 내 지인들에게 알려질까 하는 걱정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진다. 무엇보다 거절당할까 봐 안절부절할 필요 없다.
이 세 가지 충족이 전부라면 사이버 공간의 관계가 유토피아일 텐데 왜 챗지피티는 굳이 인간적인 접촉감을 대화 패턴으로 시스템화했을까. 관계하고 싶지만 관계가 두려운 이들을 포섭하는데 인간적인 접촉감만큼 완벽한 미끼는 없다. 그러나 되레 이것이 인간의 관계 결핍 문제를 더욱 부각하는 역설로 이어지고 있다.
관계는 사람과 사람 사이 일대일 양방향으로 이뤄진다. 그리고 일대일은 주위의 무수한 관계들과 얽힌다. 우리는 이러한 연결을 통해 진정한 인간다움을 경험한다. 챗지피티의 관계는 양방향인 듯 보이는 일방향이다. 유저들은 자신이 원하는 정제된 정보만을 출력값으로 끌어낸다. 인간적인 접촉감은 그냥 잘 디자인된 포장일뿐이다. SNS 세상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과 연결되는 경험을 제공하지만 결국 유저들은 자기 기대 수준에 맞게 정리된 통제되고 제한된 연결로 귀결한다.
인간적인 접촉감은 느끼고 싶은데 통제되지 않는 관계는 불편한, 이 모습이 우리의 자화상이다. 그래서 사이버 공간에 인간적인 요소들이 주입된다. 완전함에 대한 갈망이 존재하지 않는 완전함의 허상을 만들어냈다. 불완전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인간적인 접촉감의 갈증은 영원히 채울 수 없다.
과학은 인간의 일상을 편리하고 살기 좋게 발전하게 했지만, 완전한 결론으로 귀결되는 인과관계에 우리 뇌를 옭아맸다.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잖아.” 직장에서 심지어는 집에서 가족 간 대화에서도 인과관계가 절대적인 기준이 됐다. 그런데 양극단이 통하듯 지나친 인과관계에 대한 요구가 최근 정치, 사회적 상황에서 보이듯 극단적 ‘무논리’인 논리 부재 상황으로 이어지는 역효과를 낳고 있기도 하다.
연결을 위해서는 불완전한 미완의 상태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미완의 관계를 완전하지 못한 관계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미완의 관계는 나와 너, 나와 우리, 우리와 우리가 서로 조율하고 균형을 잡아가면서 성장할 수 있는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창조적인 과정의 디딤돌이다.(뒤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