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균열 May 25. 2020

002. 도시와 옷에 놓인 공책; 빔 벤더스

요지 야마모토 Yohji Yamamoto를 통해 담아낸 그의 사유

<Notebook on cities and clothes> 도시와 옷에 ‘대한’ 공책 - 도시와 옷에 ‘놓인’ 공책. 번역 상 단어 하나의 차이지만, 관람을 마친 후 과연 어떤 해석이 더 적합할지에 대해 곱씹어보게 되었다. 처음 나는 감독 빔 벤더스 Wim Wenders보다  영화 속 대상인 요지 야마모토 Yohji Yamamoto라는 이름에 먼저 반응을 했고, 내가 영화를 통해 바라보고자 했던 건 도시와 옷에 ‘대한’ 노트이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이 영화는 결코 도시와 옷을 얘기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 요지 야마모토라는 디자이너와 그가 만든 옷들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기대했지만, 결국 작품이 담아내고자 했던 건 그 너머의 것이었다. 따라서, 이 영화는 ‘도시’와 ‘옷’에 대한 노트를 통해 곧 ‘그것들에 놓인 노트’를 드러내는 변증법적 함의를 담아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파리의 외설’과도 같은 퐁피두 센터 Centre Pompidou의 ‘패션과 관련된 영화를 만들어달라는’ 제의가 결국 '도쿄의 침묵'과도 같은 요지 야마모토로 귀결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되려 이 영화의 주제의식을 강하게 드러내는 듯 하다. 빔 벤더스는 도쿄의 도로를 가로지르며 디지털 이미지가 만연해지는 사회 속 '영화'의 본질과 역할,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그는 그런 물음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요지 야마모토라는 디자이너를 통해 제시하고자 했고, 이 둘은 각자 '영화'와 '옷'이라는 매개를 통해 공통된 사유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 공통된 사유는 아우구스트 잔더 August Sander의 <20세기 사람들>이라는 사진집 속에서 매듭이 지어지게 되는데, 둘 모두 그 시절 인물들의 '옷'과 그들을 담아내는 '사진' 속에 각각 자신의 가치관을 투영하고 있었다.


“과거 20세기 사람들의 사진들을 보면 그들의 얼굴과 의상만으로도 그 분들이 어떠한 직업을 가졌고 어떠한 사람인지를 쉽게 알 수가 있다. 하지만 현대인들의 모습 속에서는 그러한 것을 파악할 수 없다.”


요지 야마모토가 사유하는 '옷'의 본질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사진 속 어떤 이가 입고있는 셔츠의 주름마저도 그를 느끼게 해주는 힘, 야마모토는 그러한 힘을 옷에 부여하고자 했고 현대인들의 의생활에 그러한 힘이 결여되어 있음에 아쉬움을 느꼈다. 그는 다른 디자이너들과 같이 '이미지'로부터 옷을 만들어내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재료'에서 출발해 점차 '형태'를 구현해나갔고, 결국 재료와 형태 그 둘 간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옷을 빚어낸 셈이다. 어쩌면 그 지점이, 여타의 거장들과는 달리 큰 굴곡 없이 꾸준히 그의 노선을 30여년 간 걸어올 수 있었던 비결인 것 같다. 이를 테면 존 갈리아노 John Galliano가 거즘 30년 동안 끝없이 변모하는 패션계의 흐름을 잘 읽어내고 그에 맞는 스타일의 변주를 통해 세간에서 명맥을 이어왔다면, '패션'이 아닌 '옷'을 선보이고자 했던 요지 야마모토는 묵묵히 미묘한 질감의 차이, 재료의 차이들을 눈이 아닌 손으로 읽어내며 혹자의 살갗과 함께 그의 명맥을 이어온 것이다. 이처럼 '물질'에 대한 인식에 보다 가까이 하는 그의 태도는 곧 '검정'으로 귀결되며, 그는 검정을 통해서만 '결'과 '형태'와 같은 옷의 물성을 증대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게 검정이란 결코 옷의 본질에 대한 합목적성에만 부합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는, 모든 빛을 흡수해버리는 검정 속에 그의 응어리진 음울함을 녹여내는 것이 아닐까 짐작해보았다. 태초에 '뒤틀린' 인간의 본성.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채, 재단사인 어머니를 포함한 여성들 속에서만 자랄 수밖에 없었던 그의 뒤틀린 삶 속에서 그가 켜켜이 쌓아온 인간에 대한 이해,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을 일찍이 알아버린 그의 사유와 감정을 '검정'이란 색 속에 풀어내었던 것 같다. 그러한 차원에서 그는 '리얼리스트 Realist'였다. 정제된 이미지를 통해 모종의 환상을 사람들에게 선사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진정 한 사람의 삶을 담아내고 그 속에 녹아들 수 있는 옷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옷이 대칭을 이루지 않는 것은,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인간의 본성이며 현실이기에 그것을 그대로 옷에 투영한 결과였을 뿐이다.


Wim Wenders, Notebook on cities and clothes (1989)

"나는 파리와 도쿄와 같은 대도시라면 다 좋다. 그 안에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으며, 그 도시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나는 대도시의 분위기가 좋다."



'소비 사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대도시에 대해 느끼는 매혹', 이 모순적인 두 감정이 과연 어떻게 발현된 것일지 처음엔 쉽게 가늠할 수 없었다. 노을이 지는 파리의 한 테라스에 기대어 이러한 말을 내뱉은 야마모토의 모습을 감독이 왜 구태여 하나의 숏 shot안에 담아냈을지 반추해보았을 때 비로소 그의 저의(底意)를 좀 더 선명하게 읽어낼 수 있었다. 그는 아마, 도시가 쏟아내는 도취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도시 속 많은 사람들이 뿜어내는 깊은 숨결에 매혹된 것이 아닐까 싶다. 빔 벤더스가 <베를린 천사의 시>를 통해 베를린 사람들의 모습을 투영하고 그들에게 따스한 손길을 건내고자 했던 것처럼, 두 작가들은 결국 도시라는 공간 속에서 '인간'을 바라보고, 그들의 내면과 대면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회 속 인간 존재에 대한 사유, 그 속에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모종의 뒤틀림과 고독감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영화'와 '옷' 속에 담아내고자 했다.



"나는 요지 야마모토의 자켓을 입었을 때, 갑옷을 입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벤더스가 야마모토의 옷을 입고 느꼈던 감정은, 혹자가 벤더스의 영화를 보고 느낄 수 있는 감정과 상통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 '인간'으로 귀결되는 야마모토의 옷과 벤더스의 영화. 서로를 '이미지'로서 인식하고 개인의 기저가 아닌 피상에 시선을 두는 현대 사회 속에서 그들은 작품 행위를 통해 그 기저를 비로소 인간의 삶 속에 출현시키고자 했으리라 생각한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일찍이 현대 사회의 보편으로 자리잡아 왔다. 상호를 향한 침투를 가로막는 도시와 옷, 그것에 놓인 노트를 들여다 보며 우리의 일상에 대해 다시금 사유해보게 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001. 진실을 향한 시선; 지가 베르토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