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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ukbo May 02. 2023

2019.06.10

깃드는 것

이제 유럽에 온 지 반년 정도가 되었다. 한국에 가기까지 남은 시간이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처음 유럽에 왔을 때 한국과는 다른 환경과 결핍에 대한 어려움도 있었지만, 이제는 뭐 완벽하게 적응을 했다. 그래도 귀국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요즘 ‘한국에 가면 뭐부터 하지?’라는 생각을 굉장히 많이 한다. 만나고 싶은 사람, 먹고 싶은 음식, 보고 싶은 영화. 그러다가 문득 ‘아 목욕탕 가고 싶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목욕탕. 왜 유럽에 반년 동안 있으면서 한 번도 생각이 난 적이 없을까. 나는 한국에 있을 때 거의 매주 갈 정도로 목욕탕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잘 씻지 않게 되는 시험 기간이 끝나면 목욕탕에 가서 한 시간 넘게 뜨거운 물에 들어가 있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얼마 전까지 엄마가 목욕탕을 하셨기 때문에 나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장소였다. 유럽에 오기 얼마 전까지도 돈을 내고 목욕탕에 가는 것이 어색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한국에서 자주 가고 익숙한 장소였던 목욕탕이 왜 한 번도 생각이 나지 않았을까.


어떤 물건이나 장소든, 그것을 생각나게 하는 매개체가 존재한다. 추억이 될 수도 있고,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무엇이든지 가능하다. 나는 어렸을 때는 아빠랑 목욕탕에 자주 갔지만, 중고등학생 때부터는 보통 혼자 목욕을 했다. 고향인 부산을 떠나 대전에 와서는 항상 혼자 목욕탕에 갔다. 누군가와 같이 목욕탕에 간 기억은 거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목욕탕을 생각나게 매개체가 추억이나 사람은 아니다.


아마 게토레이라는 음료수인 것 같다. 어떠한 이유로 아빠랑 목욕탕에 가지 않게 되기 전, 아빠는 항상 목욕탕에 나와서 게토레이를 마셨다. 아빠를 따라 나도 마셨다. 목욕탕에서만이 아니라 아빠는 평소에도 게토레이를 좋아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목욕탕에서 마시던 게토레이의 냄새와 맛은 강렬했다. 마치 뜨거운 물에 있다가 찬물에 가면 물이 더욱 차갑게 느껴지는 것처럼. 그래서인지 게토레이를 보면 나는 항상 목욕탕이 떠오른다. 목욕탕의 냄새, 분위기, 공기와 아저씨들이 나누던 대화까지. 나는 아직도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나오면 게토레이를 마신다.


목욕탕에 가는 이유가 청결과 상쾌함이 전부는 아니다. 나는 평소에 생각과 걱정이 많은데, 이를 혼자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한국에서는 보통 산책이나 목욕을 하는 시간이었다. 유럽에서는 항상 혼자였고, 시간은 많다 못해 넘쳤다. 게다가 이상하게 여기서는 게토레이를 본 적이 없다.


아직도 수건을 갤 때 엄마가 하던 목욕탕 카운터에서 하던 것처럼 수건에 적힌 글이 보이게 개는 것을 보니 전 목욕탕집 아들이 맞나보다. 한국에 가면 목욕탕부터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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