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은 아무나 되는게 아니다

40대 아르바이트생의 성장 일기

by 해사

셋째를 낳고 일을 쉬다 보니 어느덧 4년.

아이가 크고 여유가 좀 생겨 덜컥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벌써 1년이 넘었다. 와 시간, 무섭다.


예전엔 이런 말이 있었다.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
어딜 가나 꼭 이상한 사람 하나는 있다. 없다면, 그게 나다.

그 시절엔 나도 그랬다. 누굴 이상하다고 수군댄 적 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이상한 건 아닐까 고민도 해봤다.
사회생활 10년 허투로 한건 아닌지 배운게 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다 이상하다는 것. 물론 나 포함.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은 나같은 단시간 근무자도 많고, 노인일자리 사업으로 함께하는 분들도 많다.
근데 ‘노인’이라고 하기엔 다들 너무 정정하시다.
다들 사회의 어떤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시다 퇴직하신 분들이 대부분이다.

처음 오시면 자기 경력을 풀어놓는 게 국룰이다.
자부심있는 눈빛으로 지그시 쳐다보는 것이 인트로.
첫 인사 때부터 그 이야기가 시작되니까.


나는 그분들께 일을 알려드리는 사람이다.
참고로, 엄마가 같은 질문 세 번 하면 짜증 내는 딸이 나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친절 그 자체. 상냥함 레벨 99. 천 번도 말할 수 있다.

단, 조건이 있다.
“기억이 안 나네요. 다시 물어봐도 될까요?”
이렇게 말하면 진짜 백 번도 괜찮다.

그런데
“나 진짜 꼼꼼한 사람이에요. 이건 못 들었어요.”
이러면 살짝 현타 온다. 나이 상관없이 별로다.

어떤 분은 전화가 무서워 잠을 못 자신다고 했다. 그 얘기 듣고, 전화를 대신 받아드렸다.
마음 약한 나는 또 그런 데 약하다.


사실 내가 하면 금방 끝날 일이다.
하지만 일을 안 드리면 미안해하신다.
아니면... 말씀이 많아지신다. 진짜 많아지신다.

그래서 적당히, 가능할 만큼, 소화 가능한 양만 드린다.
이게 은근 어렵다. 눈치 싸움이다.


여러 분야에서 근무했던 분들인만큼 누구나 특기를 드러내고 싶어 한다.

물류 출신인 분은 엑셀의 신이다.
문제는, 이미 있는 시스템을 무시하고 전부 새로 만든다.
굳이, 이걸?

기업 관리자 출신인 분은 일처리의 효율성을 외치신다.

"이건 왜 이렇게 해요?"
높은 직위의 분께도 거침없이 말씀하셔서 소심한 나는 심장이 쫄깃하다.

교장선생님 출신인 분은 말이 많으시다.
눈만 마주쳐도 30분 코스.

전업주부 출신인 분은 긴장 레벨이 상시 최고조다.
일을 주면 덜덜 떨고, 안 주면 죄송하다고 하신다.


‘그냥 내가 다 하는게 나을 것 같은데?’

그런데 어느 날, 진상 민원인이 등장했다.
“윗사람 불러와!”
그날 나는 혼이 빠진 사람처럼 허둥댔다.

그때,
교장선생님 출신이 조용히 일어섰다.
차분한 말투, 미소, 논리.
그 민원인은 심지어 웃고 돌아갔다.
진심 감탄했다.


엑셀로 뭐 그리 바쁘시던 그분은
결국 ‘버튼 한 번’에 끝나는 엑셀 시스템을 완성했다.
무려 두 달 걸렸다. 하지만 업무는 엄청 간편해졌다.

관리자 출신이 지적했던 부분은 정말로 개선됐다.
나는 그냥 ‘원래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던 일인데.

전업주부였던 분은 “제가 할 수 있는 건 인사예요.”
그리고 그 인사 하나로 칭찬까지 받게 되었다.


나는 줄곧 속으로 불평했다. 느리다고, 또 묻는다고, 답답하다고.

하지만 정작 배워야 할 사람은 누구였을까?

누군가 열심히 해온 시간은 절대 헛되지 않는다.

어떤 일이든, 헛되게 흘러간 시간은 없다.


‘아르바이트’라며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말아야지.

오늘도 내가 한 노력이, 훗날 어디서 어떻게 쓰일지 누가 아는가.

나도 언젠간 누군가에게
‘이야~ 저 분은 이런 특기가 있으시구나’
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오늘도 나만의 특기를 하나씩 쌓아보려 한다.

내일부터는 좀 더 친절하게,
좀 더 웃으며,
말씀도 조금 더 들어드려야겠다.

나는 어떤 노년을 보내게 될까? 어떤 특기를 가진 사람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