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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선 Jun 21. 2020

평양냉면은 '그 맛'에 먹는 거야

그래서 '그 맛'이 뭔데요?


#1.

황해도가 고향이시던 할아버지는 평양냉면을 좋아하셨다. 정확하게는 '이북에서 온 음식'이라면 모두 좋아하셨다. 할아버지는 주말마다 나를 데리고, 장충동이며 을지로며 평양냉면 여행을 다니셨다. 초등학생이던 나에겐 곤욕의 시간이었다. 투박한 스테인리스 냉면 그릇도 싫었고, 무심하게 담긴 면, 고명으로 올라간 오이와 삶은 달걀까지 마음에 드는 것이 정말 하나도 없었다. ‘냉면은 밍밍하고, 만두는 너무 커요.’라고 투정을 할 때마다, 할아버지는 ‘그 맛에 먹는 거야.’라는 말과 함께 껄껄껄 웃으시며 접시에 만두 하나를 더 올려주셨다. 


실향민 1세대인 할아버지는 가족애가 남다르셨다. 월마다 대가족 모임을 주최하셨는데 하필 그 장소는 늘 평양냉면 전문점이었다. 평양냉면은 큰 삼촌네와 작은 삼촌네, 그리고 우리 가족까지 매 달 모이게 하는 매개체인 셈이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중 평양냉면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할아버지가 이 날 모이자고 하시네"

엄마가 말을 전할 때면 아빠와 나는 항상 똑같은 질문을 했다.  


"설마 또 평양냉면이야?" 


#2.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는 평양냉면 전문점들을 가지 않았다. 더 이상 평양냉면을 먹자고 불러내는 사람도 없었고, 당시 대학생이던 나는 서가앤쿡이나 미즈컨테이너 같은 트렌디한 곳을 쫓아다니느라 바빴다. 


평양냉면을 다시 접하게 되었던 건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외식 관련 미디어 플랫폼에서 에디터로 일하게 된 당시, 신입 공통 수행 과제로 '가장 인상 깊었던 레스토랑'을 하나 골라 발표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인상 깊었던 음식을 돌이켜봤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건, 그렇게도 싫어하던 평양냉면이었다. 

발표를 준비하기 위해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우래옥에 방문을 했다. 10년 만에 일이었다. 


#3.

오랜만에 먹는 우래옥의 평양냉면은 참 맛있었다. 날이 더웠던 덕분이었을까. 나이가 들었기 때문일까. 진한 육향이 퍽 인상적이었다. 우래옥은 불고기가 맛있는 곳으로도 유명한데 육수를 맛보며 '역시 고기를 잘 다루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조사해보니 1등급 한우 사태로 육수를 만드신다고 했다.) 고명으로 올라간 무, 백김치, 배는 툭툭 끊기는 메밀면과 조화로운 식감을 자랑했다. 나는 이날 흔히 말하는 '완냉'을 했다. 


2015년 여름. 10년 만에 먹게 된 우래옥 평양냉면을 기념하며 사진을 찍었다. 


우래옥을 시작으로, 나의 평냉로드가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장충동 평양면옥, 입정동 을지면옥 등 할아버지가 좋아하던 곳 위주로 '할아버지가 없는 할아버지의 평양냉면 여행'은 시작되었다. 재밌었던 점은 평양냉면 전문점들마다 면의 질감, 고명, 육수의 맛 모두가 완벽하게 다르다는 것이었다. 


#4.

장충동 평양면옥 (좌) VS 입정동 을지면옥 (우). 고명의 차이가 확실히 드러난다. 


장충동 평양면옥은 소와 돼지고기로 만든 수육이 고명으로 올라간다. 무심하게 썰은 오이가 올라가는데 슴슴하고 맑은 육수와 조화가 좋다. 의정부 계열을 대표하는 냉면집으로 불리는 을지면옥은 짭조름한 국물에 편육과 송송 썰은 파가 들어가 있다. 고춧가루를 뿌려 먹는 것이 특징인데, (별 것도 아닌 고춧가루가) 육수의 감칠맛을 극대화해준다. 의정부 계열 평양냉면집은 필동면옥, 의정부 평양면옥 등이 있는데 냉면 애호가들은 면 위에 삶은 달걀이 올라가 있으면 을지면옥, 삶은 달걀이 육수에 잠겨 있으면 필동면옥으로 차이를 구분한다고 한다.


#5.

미식 관련 프로그램에서 평양냉면이 각광을 받고, 2018 남북정상회담에서의 '냉면 외교'가 화제가 되며 평양냉면은 존재 자체로 콘텐츠가 되었다. 젊은 사람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는 음식이 되며 그야말로 '트렌디한 음식'으로 신분 상승(?)을 했다. 평양냉면 마니아들은 "이곳의 냉면이 진짜 평양냉면이야."라고 서로의 취향을 공유하곤 했다. 그런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간혹 "평양냉면은 겨자와 식초를 넣지 않고 먹는 거야.", "평양냉면은 자르지 않고 먹어야 해."라고 면스플레인('냉면'과 '익스플레인(explain:설명하다)'의 합성어로, 냉면은 반드시 이렇게 먹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을 뜻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도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우리 할아버지야 말로 진짜 평양냉면 전문가거든?"라는 알 수 없는 반항심과 자부심이 끓어올랐다. 


#6.

생각해보면 할아버지는 고향인 북한에서 소위 '남한의 평양냉면러'들이 말하는 '진짜 평양냉면'을 먹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당시 경제 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1등급 한우 사태를 통으로 고아 육수를 내는 일도 흔치 않았을 것이고, 메밀과 전분 함량을 철저하게 계산하여 매일 같은 퀄리티의 면을 뽑아낼 만큼의 기술도 발달하지 않았겠지.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평양냉면을 먹을 때마다 고향의 맛을 느낀다고 하셨다. 할아버지에게 평양냉면은 무슨 의미셨을까. 어머니에 대한 향수였을까. 다시 가보지 못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었을까.


나이가 든 지금, 평양냉면에 소주 한 잔을 곁들일 때마다 할아버지의 그 미소가 떠오른다. 할아버지는 어떤 이북 음식을 가장 좋아하셨을까, 고향에서 먹던 냉면 맛은 무엇이 달랐을까. 


어릴 때 혀에 닿았던 음식에 대한 애정은 평생을 간다고 하는데, 할아버지는 그 맛의 온기를 손녀딸에게 전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왜 그 맛을 더 가까이서 공감해주지 못했을까. 가끔 마음이 아린다. 오늘은 소주에 평양냉면 한 그릇 해야지. 언젠가 할아버지를 만나는 날이 온다면 꼭 이 말을 전하고 싶다. 


"할아버지! 저 이제 ‘그 맛' 잘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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