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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선 Jan 19. 2022

1. 여의장 이야기: 셀프 인테리어는 선택의 연속

왜 선택할 것이 17463529개라고 아무도 말 안 해줬어?

*  본 일기는 주로 셀프 인테리어를 하며 느꼈던 1인 가구인의 고난기가 담겨 있을 뿐, 셀프 인테리어의 공정 팁을 알고자 하시는 분들께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함을 미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여의장'은 여의도 셀프 인테리어 장인이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이 단어를 지어주신 노난 작가님께 무한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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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돈이 없지, 취향이 없냐."

<셀프 인테리어>를 하기로 마음먹게 된 계기는 아주 간단하다. 


블로그와 유튜브에 [셀프 인테리어]만 검색해도, '셀프 인테리어 정말 힘들어요.', '셀프 인테리어 절대 하지 마세요.'등의 진심 어린 조언 등이 수두룩 나왔다. 그들이 겪은 고통이 알알이 느껴졌지만, 벌써 '오늘의 집'에 <44년 아파트의 변신! 내 취향이 가득 담긴 나만의 집> 포스팅이 인기 게시글로 올라간 상상을 하는 나를 보았다. (무서운 나년..) 아뜰리에처럼 꾸민 집에 80년대 영국식 엔틱 테이블을 두고 모카포트를 내리며, 꽃꽂이를 하고 있는 나 자신까지 말이다!!! (과거의 나년은 소개팅 장소도 나가기 전에 그 사람과 결혼식장에 들어가는 모습까지 상상하곤 했다. 이외에도 화려한 전과를 지녔다.) 나에 취한 나는 그 누구의 상대도 될 수 없었다.


무튼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일이 일치한다는 일은 무척이나 설레는 일이었다.

결국, 셀프 인테리어를 하기로 마음먹은 나는 To do list와 순서를 정했다. 시작은 그리 어렵지 않은 듯했다. 일단 셀프 인테리어의 첫 번째 시작은 <공정과정>을 외우는 것이었다. 



|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실측 -> 플로어 플랜 구성 -> 이에 필요한 자재 구매 -> 엘리베이터 보양 작업 -> 철거 -> 샷시 -> 타일 (이때 화장실, 주방, 현관을 끝내야 함) -> 목공 (상황에 따라 목공이 선행되어야 할 수도 있음) -> 주방 -> 전기 -> 도배+페인트 -> 장판 -> 걸레받이 -> 자축 -> 환호와 유난  


볼드로 표시한 부분까지가 셀프 인테리어의 첫걸음이다. 이것은 편의상 [태동기]라고 칭하겠다. 

사실 태동기의 절반은 설렘과 유난으로 보낸다. 일단 곧 변신할 아가(=나의 집)를 실측해야 한다. 

입에 펜을 물고, 줄자를 손에 쥘 때마다 왠지 모르게 전투력이 상승했다. 


수정한 도면들 무려 30개. 그 중 절반이 넘는 이유는 잘못된 실측. 기초부터 잘하자^^


실측을 바탕으로 도면을 짜야한다. 이때 정말 중요한 건 양 쪽 벽 끝에서 창문이 차지하는 길이와 높이까지도 아주 세세하게 기록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을 열었을 때, 어디까지 사용 가능한 범위 인지도 말이다. 나 같은 경우 Floor Plan프로그램을 활용했는데, 사실 이케아로 주방을 한다면 이케아에서 제공하는 3D툴을 사용하는 게 가장 직관적이다. 물론 키노트나 피피티로도 도면을 손쉽게 짤 수 있다. 있어 보여야 하는 병에 걸린 나는 열심히 3D 프로그램만 활용했지만 말이다. 


이케아 3D 프로그램은 버튼만 뚝딱 누르면 도면도를 그려준다.


변신할 집에 대한 스케치가 완료되면, 이제부터는 직접 발품을 팔 차례! 바로 자재를 구하는 것이다. 업체의 맡길 경우, 인테리어 실장님께서 엄선한 자재 후보들을 나열해주시지만 셀프 인테리어를 하기로 한 이상 "실장님 is 나. 나 is 실장님."인 것을 잊어선 안돼..  


오래전부터 예쁜 주방을 갖고 싶던 나는 주방 자재 전부를 이케아에서 구매하기로 했다. 

이케아에서 한낱 가구나 샀던 나는 이케아가 설레는 공간인 줄만 알았지. 이렇게 나를 고난과 번뇌에 빠지게 하는 공간이 될 줄이야. 


저 자그마한 문고리까지 뭘로 할 지 정해야 한다. (참고로 난 결정을 3번 번복했다)


이케아에서 주방을 하려면 선반은 무슨 색으로 할지, 문고리는 무슨 모양으로 할지, 싱크대는 도기랑 스테인리스 중 어떤 것을 선택할지, 수전은 무슨 모양으로 해야 할지, 싱크대 선반은 어떤 종류로 할지,  모든 것을 정해야 한다. (왜 이렇게 선택할 게 많다고.. 아무도 안 알려줬어..)


심지어 서랍 안은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모듈은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도 정해야 해..


주방을 이케아로 결정한 분들께 미리 고하자면, 그런 마음을 먹은 순간 5번 이상 이케아에 방문해야 한다는 것을 꼭 유념하길 바란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나도 알고 싶지 않았다... (3주 동안 무려 10번이나 발걸음을 했던 나. 이유: 번복과 선택, 선택과 번복) 약 방문 4회쯤이었던가 이케아 플래너님과 상담 예약을 잡아 내가 설계한 도면에 대한 피드백을 받는 시간을 가졌다. 타성에 젖어 보이는 듯한 플래너님은 내가 설계한 도면을 쓱 보시더니 별다른 피드백을 주지 않으셨다. 


왜 아무 말씀도 안 하시지. 내가 도면을 잘못 짜서 어디서부터 설명할지 감이 안 잡혀서 일까. 설마 내 취향이 별로라고 생각해서 일까? 내가 한 선택은 역시 틀렸던 걸까. 지금부터라도 인테리어 업자를 찾아봐야 하나. 이전에 씨씨가 추천해줬던 인테리어 업체 분 연락처가 어딨더라...


"그럼 이렇게 진행하시는 걸로 알고, 재고 체크해드릴게요."


심드렁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 이대로 진행해도 될까요? 제 걱정은 이 상판을 이걸로 선택해도 될지 모르겠어서요. 다들 이건 잘 안 한다고 해서.."


"뭐 어때요. 고객님 집인데요. 고객님이 좋으면 된거죠."


아 그렇네. 그래 내 부엌 상판 나 말고 누가 써? 그까짓 상판 내 마음대로 한다고 흉보는 사람 아무도 없다. 무서울 것도 없다. 마 이게 셀프 인테리어의 매력이다 마! 


왠지 모를 자신감이 솟아올랐다. 셀프 인테리어 멋있는거였네? 남눈치 안봐도 되고 이렇게 편한 거였네? 


상담을 마치고, 함께 발걸음을 해준 남자친구와 푸드코트로 자리를 옮겨 평일에만 제공되는 공짜 커피를 주문했다. 분명 같은 자리에서 어제도 먹은 커피였지만, 왠지 오늘은 어제와 다른 풍미가 느껴졌다. 


"이케아 커피는 정말 맛있지 않아? 진짜 기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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