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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성훈 Dec 28. 2021

무명작가의 변명

TV에서 진행하는 경연대회를 보고 있노라면 결승전에는 대부분 가족들이 방청석 한편을 차지하고 있다. 때로는 가족의 응원이 힘이 되기도 하고 (ARS를 누르게 하는 스토리 말이다. '저 이는 꼭 일등을 해서 고생한 부모에게 효도할 수 있으면 좋겠다'와 같은 바람처럼), 때로는 경연자의 감정을 그만 너무 격하게 끌어올려 망치게 한다.


가족이 나의 글을 읽는다는 것 또한 낯부끄럽다. 굳이 이렇게 이름 석 자까지 내걸고 누구에게나 닿을 수 있는 장에 글을 올리는 관종이지만 말이다. 온라인이라는 거대한 익명성의 세계는 가족이라는 이름이 닿는 순간 실체를 띄고 만다. 갑자기 현실로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요즈음은 부쩍 경연자에 눈길이 간다. 먹고살기 힘들고 긴 무명이 서러워 마지막이란 생각에 도전한다는 말이 다수이다. 그리고 경연을 하면서 음악을 할 힘을 다시 얻는다고.


글이라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 세상엔 또 이렇게 읽어주는 이 없는 글을 써 내려가는 이들이 수두룩할 것이다.


나에게 글쓰기는 부캐이지만, 서점에 가면 떡하니 내 책이 눈에 보이는 한 구석에라도 자리하는 작가였다면 아마 본캐로 삼지 않았을까 싶다. 서툴고, 앞뒤가 안 맞아 쓰다 지우기만을 반복하고, 또 맞춤법을 몰라 쓰려던 말을 차마 적어내지 못하지만 나는 글쓰기가 좋다.


그래서 나의 가족이 내 글을 읽는 것이 복잡한 감정을 일으키고 만다. '네 글이 좋다'는 말이 쑥스럽기도 하고, 힘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좌절도 된다. (내 글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유일한 이들이니까 말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읽어주는 이 없는 글을 쓰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다. 무명의 긴 시간을 함께한 경연자와 그 부모를 카메라가 훑고 지나는 것처럼, 내 글을 읽고 있을 가족의 얼굴을 상상하면 말이다.


전업작가가 되고픈 의지는 크지 않다. 한편으로는 사회생활을 해야 글쓰기 할 거리들이 생겨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기도 하고, 부캐여야 내가 원할 때 내가 원하는 형태로 자유롭게 쓸 수 있어서이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경연자들처럼 버텨낼 자신이 없어서 일지도 모른다. 바로 가족 혹은 가족의 부양이라는 현실 문제 말이다.


평소 즐기지는 않지만 오늘 경영 관련 서적을 한 권 완독 했다. CEO의 경영철학을 기술한 책인데, 요는 '나는 내 사업이, 내 일이 인류의 공영을 위한 과업이란 마음가짐으로 일한다'이다. 그렇게 믿고 살아간다 혹은 살아가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처럼 느껴졌다.


'이 분도 참 멘탈이 갑이구나.'

보험회사 CEO가 자신의 사업을 인류공영으로 잘 포장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만 요즈음의 내 고민과 엉켜 붙어 버리고 만다.

'인생의 7분의 5를 일하면서 사는데, 그 일이란 것이 돈벌이에 불과하다면 견딜 수 있을까?'


'도대체 나는 무엇을 향하고 있는걸까?'

그분도 자신의 일을 애써 포장하지 않으면, 그저 사람을 모으고 납입금을 불리고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만으로는 당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으리라.


그렇다고 전업작가라도 되면 달라질까?

해답은 얻지 못한 채 그저 또 경연자들을 바라본다. '나'와 '가족'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일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어쩜 CEO가 가장 현명한지도 모른다. 그분은 필요 이상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을 하면서도 그 일에 자신의 동기부여를 투영했으니 말이다. 적어도 그렇게 자기 최면이라도 걸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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