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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바람 Nov 08. 2023

 한민담서(韓民談書)1

1-2. 홍범도 전기 


(5) 자유시로 이동     


 1921년 3월, 나는 53세에 대한독립군단의 마지막으로 나의 대한독립군과 이청천 부대와 함께 뒤늦게 자유시에 도착한다. 

 자유시(自由市)는 극동 공화국(현재의 러시아 아무르주) 내에 있는 스보보드니를 말하는데, 먼저 이곳에 와서 살던 한국인들이 러시아어 스보보드니의 "자유로운"이라는 뜻을 의역해 붙인 이름이다.    

 

 자유시에 모인 한인무장부대는 크게 민족주의 계열의 대한독립군단과 공산주의 계열의 연해주 및 시베리아 한인 무장 세력으로 나누어져 있다.  

 민족주의 계열의 대한독립군단은 나의 대한독립군 외에 최진동 등의 총군부, 안무 등의 국민회군, 서일 등의 서로군정서가 있다. 

  공산주의 계열의 한인무장 부대로는 대한의용군(사할린부대, 사할린 의용대)인 최니콜라이의 다반군과 박일리아의 이항군, 자유대대(고려혁명군)인 오항묵의 부대 등이 있다.      


 대한독립군단은 자유대대, 대한 의용군 그 어느 쪽과도 이해관계가 없고, 다만 하루라도 빨리 통합이 마무리되어 항일무장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싶어 한다. 

 나를 비롯한 대한독립군단은 처음에는 상하이파 무장부대인 대한의용군 중심의 독립군 통합에 찬성하다가, 이후 주도권이 이르쿠츠크파 무장부대인 자유대대(고려혁명군)으로 넘어가자 1921년 5월 기존 태도를 바꿔 고려혁명군 중심의 통합에 힘을 실어준다. 대한독립군단은 공산주의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는 입장이다보니, 주도권이 공산주의 계열의 한인 무장 부대가 가지고 있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6)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     


 1921년 6월 28일, 일명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고도 하는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이 일어난다.


 자유시는 극동공화국 땅이고, 원래는 자유시의 한인 무장부대는 극동공화국 소속 부대인 이르쿠츠크파의 자유대대에 편입이 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상해파가 당시 러시아 공산당 극동국의 자유시 한인부에 상해파의 이동휘계 인물인 박애(朴愛)·장도정(張道政) 등이 활동하고 있는 점을 이용해 극동 공화국 정부의 지지를 받아 독립군들에 대한 관리를 맡는다.      

 상해파를 중심으로 전한군사위원회가 설치되고, 상해파인 일리아 박의 이항부대가 대한의용군 총사령부를 결성해 한인 부대들을 통합하기 시작한다.

 끝까지 불응하던 자유대대 장교들이 체포되고, 이항군대와 다반군대에 의해 무장해제된다. 그리고 자유대대는 극동공화국의 지방수비대로 격하되어 대한 의용군에 강제로 편입된다. 

 이렇게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 독립군 부대에 대한 통수권은 상해파와 대한 의용군의 일리아 박이 가지게 되고, 자유시로 이동해 온 간도 독립군 상당수는 이전 재러 한인독립군과 함께 대한의용군(사할린부대)으로 들어간다. 전술했듯이 나와 내가 이끄는 대한독립군도 대한의용군 중심의 독립군 통합에 찬성한다. 


  1921년 1월 설치된 코민테른 극동비서부(동양비서부)가 4월부로 러시아의 동방정책 결정권을 극동 공화국으로부터 이양받는다.  

 이런 상태에서 문제는 독립군들과 극동 공화국 농민들 사이에 대립이 극에 치달아 있다. 무장독립군은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해야 하는데, 현지 극동공화국 농민들은 협조할 의사가 없기 때문이다. 현지 농민들에겐 무장독립군을 위해 식량을 바쳐야 할 이유가 없기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결국 독립군들은 식량과 물자 조달을 위해 극동 공화국 농민들에게 약탈과 폭력을 일삼고, 이로 인해 극동 지역 농민과의 대립이 극에 치닫는다. 


 대한 의용군은 현지 농민들의 식량을 강제로 징발하고, 마자노프에서 독립군의 폭동과 약탈이 벌어지기도 한다. 특히 대한 의용군의 중심인 니항 부대(니콜라옙스크 부대)는 이미 니콜라옙스크 사건이라는 대량학살과 폭력으로 유명하다. 

 니콜라옙스크 사건은 러시아 내전 및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시기인 1920년 4월에서 5월 사이에 러시아 극동 지역 아무르 강 하구의 항구도시인 니콜라옙스크에서 적군 소속 개릴라들에 의해 벌어진 전투 및 학살 사건이다. 이들에 의한 대규모 학살, 테러 및 약탈로 인해 니콜라옙스크에서 수천 명이 살해되고 지역은 폐허가 되며 도시의 여성(소녀, 부인)에 대한 잔인한 대규모 강간살인도 벌어지는데, 일리야 박의 독립군은 수많은 반혁명파 러시아인을 살해한다.      


 오하묵은 이것을 기회로 이르쿠츠크에 있는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 동양비서부에 가서 한인무장부대의 통수권을 자기들이 가질 수 있도록 교섭한다.  

 결국 극동비서부가 자유대대를 지원하게 되자, 러시아 공산당 극동국만 믿고 한인 부대들을 통합하고 있었던 상해파와 대한 의용군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다. 당연히 부대 통합 문제로 둘 간에 갈등이 심해지고,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는 소비에트의 지지를 얻기 위해 1921년 5월에 각각 독자적인 고려공산당을 창당한다. 이 둘을 구분하기 위해 상해파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에 기반한 고려공산당은 상해파 고려공산당이라고 통상 지칭하고, 대한국민의회에 기반한 고려공산당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라고 통상 지칭한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를 결성, 적군 빨치산 영웅 갈란다라시윌린을 의장 겸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부사령관에는 자유대대의 오하묵을 임명하여 자유시 군통수권을 책임지도록 한다.

 자유시에 도착한 칼란다리쉬빌리는 자유시에 있는 전부대를 소집하여 자신이 고려혁명군정의회 총사령관임을 선포하고, 대한의용군과 독립군에게 군대를 인솔하고 자유시로 들어오라고 명령한다. 

 일리아 박은 이를 거부하고 군통수권 장악을 위해 휘하부대와 간도에서 온 독립군부대를 자유시 근처 마사노프로 이동시킨다. 사실 당시 독립군 각 부대들은 자기들의 장교에게 지휘 받기를 원하고, 다른 군대의 장교는 일면도 없는 까닭에 지휘를 받는 일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다른다. 

 하지만 내가 이끄는 대한독립군과 안무의 군대는 명령에 따라 자유시로 들어가는데, 타민족의 영토에 들어와 그 나라의 지원을 받으면서 자기들의 장교에게만 지휘받는 것을 고집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이 때 김좌진은 극비리에 부하를 거느리고 흑룡강을 건너 중국 만주지방으로 돌아간다.      


 1921년 6월 27일 결국 자유대대는 대한의용군의 무장해제를 단행하기로 결정하는데, 대한의용군에는 일리아 박을 따르는 우리 대한독립군단 부대도 소수 남아 있다. 

 6월 28일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에서 파견된 군대와 자유대대가 사할린의용대(대한의용군)에 접근하고, 오후 4시 칼란다리쉬빌리가 이끄는 소련의 적군과 오하묵의 자유대대가 사할린의용대(대한의용군)와 대한독립군단을 공격하기 시작해 기관총, 장갑차, 대포를 이용해 몰아부친다. 오후 11시 대한의용군의 연대장까지도 투항하는데, 독립군 뒤쪽에는 강이 있어 도망가지 못해 피해를 더욱 키운다.      


 희생자는 정확하지 않다.

 피해자 측인 대한의용대의 주장에 따르면, 현장에서 사망 72명, 익사 37명, 기병의 추격을 받다가 산에서 사망 200여명, 행방불명 250명으로 총 600여명이 사망하고, 917명이 체포되었다고 주장한다.

 가해자 측인 자유대대의 고려혁명군정의회는 사망 36명, 포로 864명, 질병으로 불참 19명, 도망한 30명, 행방불명 59명이라고 주장한다.     

이후 고려군정의회는 포로심사를 거쳐 일부는 수감하고 나머지는 이르쿠츠크로 이동시키는데, 나 역시 지청천과 함께 이르쿠츠크로 이동한다.  

    

(6) 소련 생활     


 1922년 2월, 나는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의 주최로 열린 극동민족대회(극동피압박인민대회 혹은 원동약소민족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간다. 

 여기서 블라디미르 레닌이 트로츠키를 통해 나를 따로 불러 단독 면담을 한 다음, 금화와 홍범도라는 이름이 새겨진 은제 마우저 C96 권총을 선물해 주고 있다. 문득 이때 레닌에게 받은 권총은 현존하지 않지만, 권총집은 지금도 남아 있다고 들은 기억이 난다. 

 독립군 중 트로츠키나 레닌과 단독 면담을 한 것은 아마도 내가 유일할 것이다. 나는 이를 계기로 이르쿠츠크에서 소련 한국계의 거물로 성장한다.      

 

  1922년 일본의 연해주 간섭군 철수를 조건으로 일본이 요구한 항일무장투쟁 단체의 해산이 이루어지고 나서, 결국 나를 비롯한 공산당 측 독립군은 무장해제된다. 

 다른 동료들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거나 다른 지방으로 흩어지는데, 나는 돌아갈 곳도 가족도 없다.

 나는 결국 러시아에 남아 소련시민으로서의 삶을 시작해야만 하게 되고, 이때 2번째 부인 이인복과 재혼해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1923년 8월 하바롭스크에서 러시아 극동과 일본에서 악명이 자자했던 사할린 부대에 소속됐던 김창수와 김오남이 나의 암살을 시도하며 불시에 공격해 이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는다. 나는 블라디미르 레닌에게서 받은 권총으로 이들을 사살하고 감옥에 갇혔다가 레닌의 증명서 덕에 석방된다. 

 1923년 연해주 남부에서 그간의 무훈으로 얻은 인망에 힘입어 한인 콜호즈를 비롯한 지역 사회의 지도자가 되고, 이후 연해주의 고려인 지도자 중 1명으로서 지속적으로 활동한다.  

  나는 1927년 59세에 소련 공산당에 정식으로 입당한다. 지도자활동으로 늘어나는 지출을 감당하기 위해 수입을 늘리기 위해서는 농장부지 확장과 연금 수령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공산당 가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1937년 나는 69세에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해 이뤄진 고려인 강제 이주로 인해 당시 소련영토였던 카자흐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SSR)으로 이주된다. 

 내가 강제 이주된 곳은 카자흐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SSR)의 크즐오르다인데, 크슬오르다는 수많은 고려인들이 정착을 한 지역으로 고려인 신문사, 원동조선사범대학·조선극장·라디오방송국·하바롭쓰크출판사 조선부 등의 고려인들이 세운 문화기관들이 즐비한 곳이다.  

 나는 그곳에 위치한 고려극장에서 고려인 희곡 작가 태장춘의 배려로 수위장을 맡고, 연금을 받으며 생활하는데 매월 80루블의 연금과 50루블의 보수를 받아 넉넉하게 생활한다. 소설가 김기철과 자주 교류하는데, 이러한 크슬오르다의 생활환경은 말년 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 

 내가 맡은 직책인 수위장은 고려극장의 배려로 얻은 것이기 때문에 일은 널널하다. 그래서 고려극장의 제일 뒷 편에 앉아 당시 인기리에 상영 중이던 연극인 춘향전, 심청전 등을 관람하고 주연 배우들과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나는 이때 태장춘의 아내 리함덕에게 독립운동가로서의 활약상을 구술하고, 이를 바탕으로 홍범도 일지를 만든다. 그 후 나의 홍범도 일지를 토대로 한 연극 홍범도를 고려극장에서 상영하는데, 연극에서 나를 너무 추켜세워 관람하기 겸연쩍어 한다. 


   1939년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중심이 되어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중국 등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을 상대로 세계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1941년 나는 73세의 나이로 소련 정규군에 지원한다. 세계 2차 세계대전의 승리가 곧 조국 독립인데, 너무 고령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한다. 나는 화가 나서 실력이 녹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사격장에 사람을 불러모은 뒤, 25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작은 동전을 총을 쏴 명중시키는 사격 실력을 과시하기도 한다. 

 제 2차 세계대전 중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물자를 아껴 전선의 병사들을 돕자.”는 선전활동을 하기도 하고, ‘레닌기치’를 읽으며 이웃들에게 전선 소식을 전하거나 직접 글을 투고하여 젊은이들에게 참전을 독려하기도 한다. 


  1942년 4월 내가 몸담고 있던 고려극장이 카자흐 SSR 동부 우슈토베(Үштөбе, Üştöbe)로 옮겨간다. 그 이후, 나는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다가 1943년 10월 25일 노환으로 병원으로 옮겨진다. 아마도 여기서 생을 마감하게 될 같다. 

  그래도 살만큼 살았으니 받아들여야 겠지. 좌우를 막론하고 독립운동가들 대다수가 일본군에 의해 사살당하거나, 투옥 중 고문 후유증으로 젊었을 때 사망하거나, 백색테러에 희생당하거나, 좌우 갈등에 희생당하거나 가난에 시달리고 망명 국가에서 암살당하는 등의 고생을 겪으면서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많다. 나와 똑같이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했고 소련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된 김경천은 내가 죽기 1년 전인 1942년 1월 2일에 사망했다. 그에 비하면 나는 보기 드물게 노환으로 죽는 케이스가 아닌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니, 문득 지긋지긋하게도 나를 따라 다니며 괴롭혔던 한 일본군 장교가 생각난다. 나는 독립군으로 고국을 떠나 만리타국을 떠돌다, 이곳 소련에 입국할 때 쓴 입국신고서의 소원을 묻는 질문에 "고려 독립"이라고 쓸 정도로 죽는 순간까지 조국 독립을 염원했다. 죽음은 두렵지 않으나, 수많은 독립군들과 내 가족을 죽게 했던 그놈을 처단하지 못한 것이 아쉽고, 결국 전쟁의 종식과 광복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차마 눈을 감지 못할 것 같다.      

 문득 다시 정신이 드니 낮 선 장년의 여인이 곁을 지키고 있고, 주의를 둘러보니 병실도 다르다. 

 나는 분명 노환으로 우슈토베 병상에 누워있는데, 이게 무슨 상황이지 하고 잠시 당황하는데, 여인이 갑자기 울부짖으며 의사를 부른다. 아마 임종 직전인 것 같다.

 의사들이 달려와 내 몸을 흔들며 나를 부르는데, 순간 문득 무언가 상쾌해지며 정신을 들어 일어섰고, 누웠던 자리를 보니 낯선 얼굴에 장년은 되어 보이는 몸이 누워있다. 저 몸에서 내가 나왔으니 분명 나인 것 같은데, 얼굴이 다르다. 



-  "홍범도 전기(3)"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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