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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바람 Dec 24. 2023

해설 단군신화(35. 교정)

신교의 교리(선교): 선교의 홍익인간교육

홍익인간교육은 홍익인간의 영성인 신통력(神通力)과 공감능력(共感能力) 교육인데, 신통력이 도(道)에 해당하고 공감능력은 덕(德)에 해당한다. 다만 보통 도라고 할 때는 도를 닦는 과정에서 생기는 도력(道力)과 공감능력의 결과로 생기는 통찰력과 독심술 같은 도력을 말하는데, 도를 이루어 신통력을 얻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흔히 도와 덕을 합쳐 도덕(道德)이라 부르듯이, 도덕교육은 신통력(神通力)과 공감능력(共感能力)을 합쳐서 도통력(道通力)이라고 하기 때문에 도통력 교육(道通力敎育)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신통력(神通力)과 공감능력은 이처럼 거의 하나로 보아도 될 만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공감능력으로부터도 발현되는 통찰력과 독심술 같은 도력이 신통력에 버금가기 때문이다.    

  



 홍익인간 교육은 영성교육으로 영(靈)과 혼(魂)과 백(魄)의 관계로 설명할 수 있는데, 신교에서는 “ 하느님의 신성(神性)으로부터 받은 영(靈)에 담긴 공감능력 즉 마음이 육(肉)에 갇혀 혼(魂) 즉 정신이 된다.”고 설명한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영·혼·백을 영(靈)·혼(魂)·육(肉)으로 설명하는데, 이미 설명했던 바가 있거니와, 영은 곧 마음이요, 백(魄) 즉 육(肉)은 육체(肉體)이며, 영(靈)이 백(魄) 즉 육(肉)에 갇히면 혼(魂) 즉 정신(精神)이 되는데, 결국 영이 육에 갇히면 정신이 되어 육체와 함께 거꾸로 마음까지 다스리게 된다. 따라서 평상시 혼 즉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고 있을 땐, 마음의 힘에 약해져 영의 공감능력이 발휘되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신교와 성경이 일치하는 부분이다.


 신교는 이어서 “공감능력이 혼과 성령(聖靈) 즉 신성(神性)을 이어 육의 신통력을 가능하게 한다.”고 설명한다. 반면 성경은 혼과 성령(聖靈) 즉 신성(神性)을 이어 천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자손인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예수가 하느님의 자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성경에 의하면 공감능력이 인간과 하느님을 이어주는 것과 신통력이 인간과 관계없는 것은 확실하다. 반면 신교는 공감능력이 인간과 하느님을 이어줄 줄뿐 아니라 신통력까지 갖게 해준다고 설명한다.      


 홍익인간 교육은 자신의 영성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마음 즉 영은 천기(天氣) 즉 하느님의 성령(聖靈)과 맞닿아 있어, 홍익인간 교육에 의해 마음과 정신이 일치하면 영(靈)의 영성(靈性) 즉 공감능력이 발휘되어 자신의 육체와 정신은 물론 세상의 모든 사물을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다. 

 이것을 신교의 홍익인간사상에서는 참나(진아, 眞我)를 깨닫는다고 하고, 세간에서는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이라 하고, 차력이나 무술의 격파나 도약 등에서는 '정신집중(精神集中) 혹은 정신통일(精神統一)'이라 부르며, 불교에서는 ‘선정삼매(禪定三昧) 혹은 진여(眞如)“라 부르고, 다른 천도신앙의 종교에서는 “하느님 혹은 자신의 신을 믿는다.”고 한다.       


홍익인간 교육은 ① 도(道)에 해당하는 신통력 교육 ② 덕(德)에 해당하는 공감능력 교육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것을 합쳐서 도통력 교육이라고 한다.      


(1) ()에 해당하는 신통력 교육     


 도에 해당하는 신통력 교육은 말 그대로 깨달음 즉 도(道)를 익히는 과정에서 얻는 인내력(도력)과 득도(得道)를 통하여 얻는 신통력으로 참고 견디는 힘과 신기한 능력을 가지게 하는 교육이다. 

 예수나 석가모니 등이 행했던 수많은 이적(異蹟)이 이에 해당하는데, 차력(借力)' 비행술(飛行術)' 축지법(縮地法)' 천리안(千里眼)' 기문둔갑(奇門遁甲)' 장풍(掌風)' 염력(念力)' 유체이탈(幽体離脫)'  등의 초능력과 관련된 신통력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많이 회자 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신교의 수행법인 홍익인간수련법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2) ()에 해당하는 공감능력 교육     


 덕(德)에 해당하는 역지사지심(易地思之心)과 배려심(配慮心) 교육은 역지사지심과 배려심의 근원이 되는 홍익인간의 영성인 공감능력(共感能力)에 대한 교육이다. 

 공감능력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는 공감(共感)으로 부터 출발한다. 공감에 정면으로 대체되는 단어는 이기심(利己心)인데, 이기심을 넘어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위치를 바꾸어 생각해보는 마음을 역지사지심이라고 한다. 따라서 공감능력=역지사지심이 된다. 그리고 공감능력으로부터 배려심이 나오므로 공감능력=역지사지심=배려심이 된다.

 사람은 홍익인간의 씨앗이기 때문에 누구나 공감능력으로 역지사지심과 배려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악업을 쌓은 영향이던, 아니면 후천적으로 태내에서 부모의 영향을 받거나 태어나 부모와 사회의 영향을 받은 때문이던, 대부분은 공감능력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다. 물론 그렇지 않고 영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 수가 극히 드물다. 교육이 필요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보통의 경우 홍익인간교육을 말할 때는 신통력 교육과정에서 얻어지는 도력 즉 인내력 교육과 공감능력 교육의 의미한다. 신통력을 얻는 것이 극히 어렵고 드물어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홍익인간교육에서 홍익인간의 영성이라고 할 때는 공감능력과 신통력과 공감능력에 모두 해당되는 도력을 말한다.


 선교에 따르면 인간은 홍익인간의 천도에 따른 하느님과의 맹약에 따라 누구나 교육을 통하여 홍익인간의 영성(靈性)을 키워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고, 인류가 만든 국가나 다른 사회집단이나 인류사회 전체  역시 홍익인간의 영성교육(靈性敎育)을 하여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물론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인류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고,  누구나 사회적 동물인 이상 남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홍익인간의 영성(靈性)은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생존권이라고 할 수도 있고, 홍익인간의 영성(靈性)이 없는 사람은 사회에서 살아갈 생존권이 없는 사람이라 할 수도 있다. 공공의 안녕과 사회질서 확립을 위해서는 사람에게 해를 입히거나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악마같은 인간을 배출해선 안되기 때문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민주주의 교육방식에서는 국가교육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초등교육에서조차 홍익인간의 영성교육(靈性敎育) 즉 덕성교육(德性敎育)이 거의 무시되고 있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도 덕성교육을 도외시하는 상태에서 사회발전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아마도 미친 생각일 것인데, 이런 이율배반적인 상황에 대해서 아무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 가정' 학교' 국가 등 사회 전반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불법과 탈선과 범죄 행위는 물론 환경문제에 이르기까지, 가정·학교·국가 등 사회의 근간을 뒤흔드는 이런 모든 문제들은 바로 이로부터 발생한 것이다.      

 

 홍익인간의 영성교육(靈性敎育) 즉 덕성교육(德性敎育)은 홍익인간에 반대되는 행위를 막기 위한 방편인 역지사지심 교육을 통하여 이루어 질 수밖에 없다. 홍익인간을 간단히 규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법률가, 도둑놈, 정치가 등은 명칭에는 이를 규정하는 명확한 행위와 인물의 예가 있는데, 반면 홍익인간은 널리 이롭다는 의미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음에도 명칭을 규정짓는 명확한 행위가 없다. 물론 역사 속의 홍익인간을 예로 드는 방법도 있지만, 단군 외에는 홍익인간에 대한 인물의 예가 없기 때문에 대상이 될 수가 없다. 홍익인간의 영성교육(靈性敎育)이 역지사지심 교육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인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역지사지심으로부터 배려심이 나온다. 배려심은 구속(拘束)을 참을 줄 아는 인내심(忍耐心)과도 같은 마음이다. 내가 만약 상대라고 한다면 하고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보면 배려심이 생기고, 배려심으로 부터 내 욕심과 이기심 대로 하지 않고 인내할 수 있는 희생심(犧牲心)이 생기기 때문이다.   

  역지사지심(易地思之心)으로 부터 배려심이생기고, 배려심으로 부터 인내심이 생기며, 인내심으로 부터 대아(大我)와 대의(大義)를 위해 소아(小我)와 소의(少義)를 버릴 줄 아는 희생심이 생긴다. 따라서 교육은 참지 못하는 마음을 참도록 구속(拘束)하는 곳, 역지사지하지 못하여 남에게 피해주지 않도록 처벌(處罰)하고 훈육(訓育)하는 곳, 기꺼이 남을 도울 수 있도록 격려(激勵)하고 칭찬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아이를 가르치는 학교와 학교의 선생님과  학부모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학교에서 역지사지심이 사라지면, 교육청과 교장·교감과 교사 간에 지배 관계가 형성되고, 학교가 학생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를 잊게 된다. 따라서 학교는 더 이상 영성교육 도장(靈性敎育 道場)이 아니고, 기술을 파는 학원이자 폭력을 조장하는 장소가 된다. 초등교육까지 영성교육도장에서 기술교육 학원이자 폭력 도장으로 바뀌면 영성과 덕성이 사라져 결국은 교육체제와 사회체제나 국가체제에서 인륜이 없어지게 된다. 

 부모 역시 마찬가지로 부모가 역지사지심이 없으면, 흔히 부모가 아이의 거울이라고 하는 말처럼 대부분의 경우 아이도 역지사지심이 없고, 부모가 아이를 대하는 시간이 적어서 자신의 아이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며, 비뚤어진 자신과 아이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아이에게 부모의 훈육이 필요하지만, 이럴 경우 부모의 훈육이 오히려 독이 된다. 사실 부모가 역지사지심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 자식이 귀하다 보면 편향적이 되기 쉽다. 아이에게 학교 교육의 덕성이 필요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부모는 학교가 기술을 파는 학원이 아니라, 덕성을 가르치는 영성교육 도장(靈性敎育 道場)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집에서 좋은 부모가 아이의 거울이듯이, 영성교육(靈性敎育) 즉 덕성교육(德性敎育) 현장인 학교에서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님 역시 아이의 거울이다. 물론 선생님도 사람이기에 부족한 면이 있겠지만, 그래도 교육을 천직으로 삼아 아이와 가장 믾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다. 그뿐아니라 여러 아이 중에서 벗어난 한 아이를 바라보며 그나마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 선생님의 훈육에 모든 것을 맞겨야 한다. 그런데 학교를 영성교육 즉 덕성교육장이 아닌 기술교육장으로 인식하게 되면, 그런 생각이 사라진다. 아이를 학교에 맞기는 일은 옷 집에 옷 수선을 맞기는 일과는 다르다. 아이는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미숙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흔히 아이의 인권을 이야기 하는데,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인권(人權)보다 중요한 사회성 즉 역지사지심이다. 따라서 가정이나 학교의 교육에서 체벌이 없어야 한다는 이론은, 아이의 인권에 집착하여 영성교육을 망치는 잘못된 이론이다. 교육을 위해서는 때에 따라 체벌도 필요하다. 훈육과 체벌은 다르다. 이유없이 막무가내로 체벌하는 것을 폭력으로 본다면, 아이에게 왜 체벌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를 시키킨 후 합당한 체벌로 훈육하는 것을 폭력으로 매도해서는 안된다. 아이가 선생님의 교육을 방해하고 심지어는 부모가 나서 이이를 비호는 것은 물론 심지어는 선생님에게 폭력까지 행사하는 것은 교육의 근간을 뒤흔드는 행위로 사회나 국가의 근본을 파괴하는 가장 큰 폭력이라 할 수 있다.  

 부모가 선생님을 압박하여 영성교육을 막으면, 아이는 악마로 클 수 밖에 없고, 결국은 아이의 생존권(生存權)을 박탈하는 행위가 된다. 따라서 부모가 아이를 학교에 보내놓고 교육에 간섭하는 것은 결국 아이를 악마로 키우는 결과 밖에 되지 않는다. 그나마 학교 밖에서 악마 짓을 하면 그 피해가 부모니 사회에게 돌아가지만, 학교 안에서 악마 짓을 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다른 아이에게로 돌아가고, 결국은 학교 붕괴와 사회와 국가의 붕괴로 이어진다. 물론 일부 자라서 개과천선하는 아이들도 있을 것이지만, 이미 형성된 악마성은 사라지지 않고 잠재의식으로 가라 앉아 시한폭탄처럼 도사리고 있다가 언제던 계기가 되면 발현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이 자라서 학교 밖에 나가서 악마 짓을 하면 그야말로 현실 속에서 지옥이 재현되는 것이다.      


 선생님과 학교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선생님은 학교에 영성교육을 하러 나가는데, 정작 학교가 영성교육 도장(靈性敎育 道場)이 아니라면,  결국 학교에서 선생님이 발을 부칠 곳이 없게 되고, 그 영향은 결국 전체사회와 국가의 붕괴로 이어진다. 학교에서 영성교육(靈性敎育) 즉 덕성교육(德性敎育)이 사라지면 참으로 아이러니 하게 적과의 동침이라는 말이 그대로 적용되는데,  시어머미를 비난하던 아내가 시어머니를 닮아 더 시어머니 짓을 하고 아이가 나쁜 부모를 닮아 나쁜 행동을 그대로 본받듯이, 선생님 역시 학교 책임자가 되면 대부분이 희안하게 못된 갑질만 골라 배워서 그대로 한다. 

 이제 학교는 영성교육 도장(靈性敎育 道場)으로 바뀌고, 학교를 둘러싼 제도 역시 영성교육(靈性敎育) 제도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학생이 살고, 선생님이 살고, 학교가 살고, 나아가서는 전체 사회와 국가가 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병아리 처럼 곱고 예쁜 아이들이 살고, 그런 아이들이 살아갈 아이들의 미래가 산다.   

   

 신교나라(神敎那羅) 고조선(古朝鮮)은 홍익인간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 목적으로 종교정치 국가 구려조선을 세워 홍익인간 정치를 하는데, 홍익인간정치(弘益人間政治)와 그 철학사상인 홍익인간정치사상(弘益人間政治思想)에 대해서는 구려조선 건국 편에서 후술하겠다.      




  종교나라 고조선의 선교는 인류역사상 가장 최초이자 최후로 영성교육(靈性敎育) 즉 덕성교육(德性敎育)을 성립했던 빛나는 역사이다. 

 대한민국은 선교의 가르침인 홍익인간사상을 이어 받았지만, 2,000여년의 전제군주시대를 거치면서 통치역사와 함께 권력욕과 재물욕으로 가득찬 헛된 영웅담과 권력욕과 재물욕에 의해 변질된 철학사상을 가르쳐왔고, 근 현대에 이르러서도 자본주의에 의해 홍익인간사상의 가르침은 교육에서 사라지고 없고, 통치 권력자와 재력가 중심의 영웅담만이 역사의 전면에 남아있다.     

  

 홍익인간의 영성교육은 서기 역사의 시작과 함께 우리 한국역사에서 지도자격의 위치에 섰던 권력자와 권력 집단에 의해 시작된 사대적인 국가정책 속에서 사라지고 없으며, 대한민국정부수립과 함께 홍익인간사상만이 건국교육이념으로 법제화 되어 지금에 이르러 있다. 대한민국이 건국교육이념을 홍익인간사상으로 정했다는 것은 국가정책으로 교육의 목표를 인성교육(人性敎育)으로 정했다는 의미이다. 

 사실 기술교육(技術敎育)보다 인성교육(人性敎育)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교육자는 없으며, 교육의 목표가 인성교육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부모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의 교육은 인성교육보다는 기술교육에 치우쳐 있다. 

 인성교육이 인간의 신성(神性) 회복을 위한 인간혁명(人間革命)에 목적을 둔다면, 기술교육(技術敎育)은 인간의 풍요로운 삶을 위한 기술혁명(技術革命)에 목적을 둔다. 또한 인성교육(人性敎育)이 남들과 평등한 삶을 목표로 풍요의 평준화에 가치를 둔다면, 기술교육(技術敎育)은 남들 보다 나은 삶을 목표로 개인적 풍요의 극대화에 가치를 둔다. 개인적 풍요의 극대화로 부터 차별이 발생하고, 차별로 부터 대립과 범죄를 비롯한 인류사회의 모든 문제들이 발생한다.      


 선교는 홍익인간의 인성교육을 통하여 인간혁명을 추구하였던 우리 한국고유의 교육법이다. 신성인간(神性人間)을 목표로 동물성의 인간을 영적인간인 홍익인간으로 교육하며, 홍익인간교육으로 약육강식과 생사고락의 인간사회를 홍익상면(弘益相勉)과 무병장수(無病長壽)의 행복사회로 만드는 목표보다 더 큰 인간혁명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오늘날 국민적 정서와 교육정책이 인성교육보다 기술교육이 중시되었던 까닭은 아마도 2천 여 년에 이른 사대적 전제통치와 일제의 약탈과 6.25 동란으로 나락에 떨어졌던 국민경제를 살리고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기술혁명이 필요하였고, 기술혁명을 위해서는 기술교육이 필요하고 또 개인적으로도 돈과 권력을 보장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총생산이 국민총소비를 넘어서고 세계경제 순위 10~11위를 다투는 오늘날의 시점에서 교육에 대한 국민적 정서와 교육정책을 이제는 현재의 기술교육을 통한 기술혁명에서 교육목표에 맞는 인성교육을 통한 인간혁명으로 바꾸어야 할 중요한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해설 단군신화(36)- "신교의 수행법(선도수련법): 기초1(선교의 우주관)" 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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