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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바람 Jan 01. 2024

홍인인간 전당 이야기 4

박혁거세 전기

 홍익인간 전당(弘益人間 殿堂이야기는 네 번째 주인공으로 박혁거세를 명예의 전당에 올린다.  

 박혁거세는 중국에서 한반도로 이주한 한민족 중에 최초로 고대국가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인 동시에 고조선 시대를 재조명해 볼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토대로 박혁거세의 탄생과 신라 건국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해석을 달아 보았다.




1. 박혁거세     


 ① 박혁거세는 단기 2,264년(BC 69년) 3월 1일 나정(蘿井) 곁의 숲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곳에는 고조선(高朝鮮)의 유민들이 산골짜기 사이로 나누어져 6촌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한다),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이라 하였는데, 고허촌장 소벌공이 박혁거세를 주워다 키웠다.      

 당시 소벌공은 사람들에게 “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곁의 숲 사이에 말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그래서 가 보니 갑자기 말은 보이지 않고, 큰 알이 한 개 있어 깨뜨려 보니 한 아이가 나왔다. 알의 모양이 표주박 같이 생겨서 성을 박(朴)으로 하였다.”고 말했다. 


 ② 마침 포구 가에 아진 의선이라는 노파가 살았는데, 혁거세 왕의 해척지모(海尺之母: 고기잡이 어미)였다. 노파는 배를 바라보면서, “이 바다에 바위가 없었거늘 웬 까닭으로 까치가 모여 우는가?:라고 하며, 날랜 배를 보내 살펴보게 하였다. 까치는 한 배 위에 모여 있었다. 배 안에 궤짝 하나가 실렸는데, 길이가 20자요 너비가 13자였다. 그 배를 끌어다 수풀 한 귀퉁이에 두었지만, 그것이 좋은 징조인지 아닌지를 몰랐다.     


③ 단기 2,276년(BC 57년) 박혁거세가 12세가 되었을 때, 육부 촌장들이 모두 유달리 숙성한 그를 받들어 거서간(居西干) 혹은 거슬한(居瑟邯)으로 부르며 왕으로 모셨고, 국호를 사로국(斯盧國)으로 정했다.  

    

④ 박혁거세는 단기 2,280년(BC 53년, 재위 5년) 알령(閼英)을 황비로 맞이하였다.     


⑤ 혁거세 거서간은 금척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으로 사람을 재면 죽은 사람을 살리고 병든 사람을 고칠 수 있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사신이 와서 빼앗아가려 하자 이를 땅에 파묻고 주변에 무덤을 여러 개 만들어 감춰버리고 이후 다시 못 찾았다.      


⑥ 박혁거세는 서기 4년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봄 3월에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갔는데, 8일 후에 몸뚱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그리고 왕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하직한다. 나라 사람들이 이들을 합장하여 장사 지내려 했으나, 큰 뱀이 나타나 방해하므로 머리와 사지를 제각기 장사 지내 오릉을 만들고 능의 이름을 사릉(蛇陵)이라고 하였다. 혹은 뱀이 무덤을 지키기에 사릉이라고 한다. 이후 사릉(蛇陵)에 장사 지냈는데, 담암사(曇巖寺)의 북쪽에 있다.     


 ( 해석 )


 박혁거세(朴赫居世)는 신라 건국 시조이자 초대국왕이다. 그러나 초대국왕이라고는 하지만 왕인 동시에 고조선의 종교인 신교(神敎)의 종교지도자 정도로 추정된다. 그 이유를 살펴보았다.   

   

 ① 신라의 시원이 되는 육부촌은 고조선 유민의 나라이고, 고조선은 신교를 신봉하였던 종교 나라였으며, 육부 촌장이 지은 이름이 박혁거세였다.

 박혁거세의 성씨 박(朴)은 나무를 뜻하는 목(木)과 점을 치는 사람이나 무속을 뜻하는 복(卜) 자를 합성한 단어이고, 또한 박은 우리말 ‘밝’에서 유래한 단어로 이름 혁거세(赫居世)의 “세상에 태어나 살면서 빛을 밝힌다.”는 의미와 같다. 

 한국 고기에 의하면 고조선 당시 선인(仙人)들을 ‘밝니’라고 하기도 했는데, “세상을 밝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박혁거세(朴赫居世)와 의미가 같다. 따라서 박혁거세가 고조선의 종교인 신교의 종교지도자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 ② 신라가 왕 중심의 통치 권력 체제를 갖춘 것은 17대 내물왕(356-402) 때였다. 그는 ‘마립간(麻立干)’이라는 왕의 칭호를 처음으로 사용하였으며, 이후 김씨가 왕위를 세습하는 체제를 공고히 하였다. 또한 낙동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지방까지 왕의 권력이 미칠 수 있도록 행정 조직을 강화하였으며, 고구려를 통해 중국 문물을 수입하는 데 힘써 한자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내물왕 당시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으로 인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는데, 신라는 고구려와의 우호적 관계를 통해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왜와 가야의 침략에 맞서 고구려에 군사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즉 17대 내물왕으로부터 전제군주국가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원래 고조선 유민으로 이루어진 부족 연맹체였던 신라는 시조인 혁거세로부터 국가를 이루었고, 박혁거세에서 흘해이사금까지 3개의 성씨가 번갈아 최고 권력자가 되었지만, 왕이 아닌 이사금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전제군주국가에서는 3개의 성씨가 번갈아 왕이 되고 이가 많은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연장자라 하여 왕으로 받드는 것이 일어날 수 없는 일인데, 박혁거세에서 흘해이사금까지의 신라왕 계보를 보면, 박혁거세의 아들인 2대 통치권자 박남해(朴南解, 4-24)의 왕명이 차차웅(次次雄)이고, 남해차차웅이 아들인 3대 왕 박유리(朴儒理)로부터 13대 왕 김미추(金味鄒)를 거쳐 16대 왕 석흘해(昔訖解)가 모두 왕명으로 이사금(尼師今)을 사용하면서 박(朴)·석(石)·김 3개의 성씨가 번갈아 통치권자가 된다. 그런데 통치권자의 명칭을 왕이 아닌 차차웅과 이사금으로 표현하고 있고, 차차웅(次次雄)의 웅(雄)은 환웅의 뒤를 이은 단군을 의미하는 것으로 다음 웅인 박혁거세의 다음 웅이라는 뜻이고, 이사금의 “지혜로운 사람·연장자” 역시 단군으로부터 비롯된 이름이다. 즉 신라는 적어도 16대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 310–356) 까지는 전제군주국가가 아닌 고조선의 신교를 이어받은 국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③ 박혁거세의 왕명인 거서간(居西干) 혹은 거슬한(居瑟邯)의 간(干)과 한(邯)은 고조선(古朝鮮) 때의 군장의 명칭과 유목민족의 군주를 뜻하는 칸(Khan)의 한자 표기로 상용되는데, 간(干)과 한(邯)이 한(汗, 韓, 桓) 등 고조선(古朝鮮)의 군장과 같은 명칭이다. 또한 거슬한의 슬(瑟)자가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거문고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도 짐작할 수 있는데, 왕은 세상을 힘으로 다스리며 백성들의 눈물과 피로 국가를 경영하는 존재이지, 국가가 밝게 빛나거나 아름다운 소리로 가득 차게 하는 존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④ 금척(金尺)의 전설이 얽힌 곳은 경주시 금척리 고분군으로, 금척은 경주 삼기 팔괴 중 삼기의 하나로 꼽는다. 금척은 고조선과 관계있는 신물로 천부 삼인 중 하나이다. 경주 삼기(慶州 三奇)는 금척 외에 장마 때 비를 그치게 하고 가뭄 때는 비를 내리게 하는 힘이 있는 신비스러운 피리 만파식적(萬波息笛)과 분황사 탑에서 나온 불을 만드는 빛깔이 마치 수정처럼 맑고 고운 구슬 화주(火珠)이다. 천부 삼인 중 금척 외에 거울과 종이 있는데, 거울의 성격이 화주와 비슷하고, 종의 성격이 만파식적과 유사하다.      




2. 선도 성모와 알령 부인     


① 선도산 신모는 본디 중국 황실의 딸로 이름은 사소(娑蘇)였다. 어려서 신선의 술법을 익혀 동쪽 나라에 와서 살더니, 오래도록 돌아가지 않았다. 아버지인 황제가 솔개의 발에다 편지를 묶어 부치면서, “솔개를 따라가 멈추는 곳에 집을 지어라.”라고 하였다. 사소는 편지를 받고 솔개를 놓아주자, 선도산에 날아와 멈추었다. 그대로 따라와 집을 짓고, 솔개를 따라가 이 땅의 신선이 되었기에 이름을 서술산(서솔산) 한자로는 서연산(西鳶山)이라 했다. 신모가 처음 진한에 왔을 때, 성스러운 아들을 낳아 동국의 첫 임금이 되게 하였으니, 혁거세와 알영 두 성인이 그렇게 나왔다.     


 ② 신라 26대 진평왕 때 지혜(智惠)라는 비구니가 안흥사(安興寺)의 불전을 중수하려고 계획을 세웠으나 비용이 없어 고민하고 있을 때, 꿈에 한 여선(女仙)이 아름답게 치장하고 나타나 위로하고는 자신은 선도산의 신모(神母)인데, 불전 중수하는 일을 도우러 왔다며 자신의 자리 밑에 금 10근이 있으니 가서 불전 중수 비용에 쓰되, 불전에 주존삼상(主尊三像)을 안치하고, 벽에는 53부처와 육류성중(六類聖衆)과, 아울러 여러 천신(天神), 오악신군(五岳神君)의 그림을 그려 붙이고, 매년 춘추로 10일에 사람들을 모아 점찰법회(占察法會)를 개최하라고 말했다.

지혜 비구니가 꿈에서 깨어 사람들을 데리고 선도산으로 가서, 신사(神祠)의 좌석 밑을 파니 과연 황금 160냥이 나왔으며, 그걸로 불전을 중수하고 신모가 일러준 대로 모두 설치했다. 일연 당시(원 간섭기)에 그 불당의 설치물은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점찰 법회는 없어졌다고 한다.    

 

③ 신라 54대 경명왕이 산에 매사냥을 나왔다가 사냥 매를 잃었는데, 신모 상에 빌어서 사냥매를 찾아주면 작위를 주겠다고 하자 과연 사냥 매가 책상 위에 날아와 앉았으므로, 왕이 신모를 대왕(大王)으로 봉했다.    

 

 ④ 신모가 여러 천선(天仙)을 시켜 비단을 짜고 붉게 염색해 조의(朝衣)를 만들어 그 남편에게 주었으니, 나라 사람들이 신이롭게 생각했다.     


 ⑤ 김부식이 고려 예종 11년(1116), 사신의 일행이 되어 송나라 조정에 갔다. 일행을 접대하는 송나라 사람 왕보(王黼)가 한 사당에 걸린 선녀의 초상을 보여주는데, 고려의 신 선도성모(仙桃聖母)라며 “옛날 어느 제왕가의 딸이 남편 없이 임신해 사람의 의심을 받게 되자, 곧 바다를 건너 진한에 도착해 아들을 낳았는데, 곧 해동의 첫 임금이다. 딸은 지선(地仙)이 되어 오랫동안 선도산에 살았는데 이것이 그 초상화이다.”라고 설명해 주었다. 김부식은 “선도산 신모며 아들이라니,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가. 그의 아들이 어느 때 왕 노릇 했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조공을 드리러 온 나라의 신하인 입장에서 더는 입을 열지 목했다.

 그 후 송나라 국신사 왕양(王襄)이 고려에 와서 '동신성모(東神聖母)'에게 제사 지낸 글에, "현성(賢聖)을 낳아 나라를 세운"이라는 구절이 있었기에 김부식은 동신성모가 즉 선도성모라고 추측했다. 다만 처음 듣는 이야기라 "그 아들이 어느 때 왕 노릇을 했는지 알 수 없다"라고 주석을 달았다.     


⑥ 신중동국여지승람: 경주 선도산엔 '성모사'가 있어 선도성모를 모셨고, 토함산엔 '석탈해사'가 있어 석탈해를 모셨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있던 서악대왕, 동악대왕의 제사가 그대로 이어진 듯 하다.     


 ⑦ 고려도경(서긍): 동신성모는 개경 선인문 안 동신사(東神祠)에서 모신 신이었다. 동신사에서 제사 지낸 뒤, 누군가가 동신성모는 '고려시조를 낳은 부여의 아내이자 하백의 딸'이라고 설명했다.     


⑧ 여섯 촌장들은 박혁거세를 맞이한 뒤 부인이 될 만한 여자아이도 찾아 나섰다. 그러던 중에 알영지(閼英池)라는 연못가를 지나가다 우물 옆에서 닭처럼 생긴 용을 발견했는데, 그 용은 왼쪽 겨드랑이로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았다. 사람들이 여자아이의 입술을 냇가에서 씻기자 부리가 떨어졌고, 고운 얼굴이 드러났다. 혹자는 연못을 지나가던 할머니가 닭처럼 생긴 용이 왼쪽 겨드랑이로 여자아이를 낳는 것을 발견하고, 데려와 목욕을 시키니 태어났을 때 닭의 부리 모양이었던 아기의 입술에서 부리가 빠지고 예쁜 여자의 모습이 되었다고도 한다.

 촌장들은 알영지의 이름을 따서 알영(閼英)으로 이름을 짓고 우물을 알영정(閼英井)이라 했다고 하는데, 이때 13세의 빼어난 용모와 덕행을 갖춘 여성으로 성장해 있었다.      

‘알영정’이라는 우물가에서 닭처럼 생긴 용을 발견했다. 그 용은 왼쪽 겨드랑이로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았다. 사람들이 여자아이의 입술을 냇가에서 씻기자 부리가 떨어졌고, 고운 얼굴이 드러났다. 촌장들은 이 여자아이의 이름을 ‘알영’이라고 짓고 혁거세와 혼인시켰다. 이후 두 사람은 서라벌의 임금과 왕비가 되었다.


알령은 알령지(閼英池)라는 연못을 지나가던 할머니가 닭처럼 생긴 용이 왼쪽 겨드랑이로 여자아이를 낳는 것을 발견하고, 데려와 목욕을 시키니 태어났을 때 닭의 부리 모양이었던 아기의 입술에서 부리가 빠졌으며, 알영지의 이름을 따서 알영(閼英)으로 이름을 짓고 우물을 알영정(閼英井)이라 했다고 하는데, 이때 13세의 빼어난 용모와 덕행을 갖춘 여성으로 성장해 있었다.      

⑨ 박혁거세가 승하한 직후 알영도 따라 세상을 떠났다고 하며 이들을 합장하려 하니 큰 뱀이 나타나 방해해서 결국 따로 묻어서 오릉이 되었다.     


( 해석 )


 선도성모는 박혁거세의 어머니이다. 중국 황녀 출신으로 어려서 신선의 술법을 익혀 동쪽 나라 즉 진한의 육부 촌에 와서 남자아이를 낳았고, 선도산에 집을 짓고 진한의 신선이 되었는데, 그 아이가 자라서 진한의 왕이 됨으로써 혁거세와 알영 두 성인이 탄생한다. 그리고 이 설화가 사실임을 안흥사(安興寺)의 불전· 경명왕의 매사냥· 신모의 비단조의(朝衣)· 김부식이 중국에서 본 동신 성모상· 알령지와 알령정· 오릉 등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가 움직인 궤적은 당시 고조선 유민의 한반도 이주 경로와 같고, 고조선 유민들이 신교를 믿었음을 감안하면 그중에 선인(仙人)도 있었을 것인데, 선도 상모는 신선의 술법을 익히다 그들을 따라 들어와 선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도성모가 진한에 들어온 직후에 박혁거세를 낳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육부촌장이 데려다 키운 아이가 바로 박혁거세 일 것이고, 아마도 서남 쪽의 궁실에서 유모의 손에 자라면서 의선의 지도를 받았을 것이며, 당연히 자라면서 생모에 대한 숱하게 많은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라면서 육부 촌장들이 고조선 유민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고, 생모 역시 고조선의 유민을 따라 들어와 박혁거세를 낳고 피치 못할 사정으로 버리고 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선도성모가 사실은 아들인 박혁거세의 유모가 되었는데 신선으로 우상화되었을 확률이 높고, 박혁거세의 해척지모였던 아진 의선이라는 노파는 바로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선인이 되게 만든 인물일 수도 있다.     


 설화의 전체적인 맥락을 보았을 때, “육부 촌장들이 한반도로 와서 진한을 세울 당시 선도성모가 함께 중국에서 건너와 남매를 낳았는데, 소벌공이 왕으로 내세울 계획으로 박혁거세만 데리고 가서, 왕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박혁거세가 왕이 된 후 당연히 선도성모는 여자아이를 찾으려 했을 것이고, 육부 촌장이 찾아서 ” 닭처럼 생긴 용의 왼쪽 겨드랑이에서 태어났고 부리가 달렸었는데 빠졌느니“ 하는 등의 거짓말로 우상화를 시켜 왕비로 만들었을 것이다. 설화에서 박혁거세의 어머니가 선도성모로 우상화된 것과 박혁거세와 알령이 남매로도 묘사되고 있는 것은 이런 맥락으로 보이는데, 둘이 실제로 왕과 왕비가 되었고 당시까지만 해도 근친혼이 선했을 때이니 틀린 사실은 아닐 것이다.     


 진한의 소벌공과 육부촌장이 박혁거세와 알령을 왕과 왕비로 만들고, 그 어머니를 선도성모로 신화화까지 하여 신라를 세워서 무엇을 노렸는지는 모르나, 박혁거세는 신교교황으로서의  몫을 다한 것 같은데, 그의 치세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3. 박혁거세의 치세             

  

 ① 박혁거세가 사로국 교황이 되었을 당시 북쪽에는 삼한의 유민들이 북부여(北扶餘)와 동예(東濊)와 옥저(沃沮)를 중심으로 전한(前漢)의 낙랑군을 북쪽 경계로 삼아 섞여 살고 있었고, 서쪽에는 목지국(目支國)을 중심으로 마한(馬韓)의 유민들이 살고 있었으며, 남쪽에는 우유국(優由國)을 중심으로 변한(弁韓)의 유민들이 살고 있고, 삼한의 접경지역에는 이서국(伊西國)을 중심으로 변진(弁辰)의 유민들이 살고 있었다. 

 진한에는 12개의 소국이 있었고, 마한에는 54개의 소국이 있었으며, 변한에는 12개의 소국이 있었는데, 저마다 왕이라고 하며 수많은 소국(小國)을 이루고 살았으니 전제군주시대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교도들은 북쪽의 북부여(北扶餘)·동예(東濊)·옥저(沃沮)와 삼한 접경지역인 이서국에 특히 많이 살았는데, 북쪽에는 삼한의 유민이 섞여 살고 있어 삼한에 들어가지 않는 점과 이서국이 삼한 중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는 변진으로 불리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② 단기 2,283년( BC 50년, 즉위 8년), 왜구들이 쳐들어왔으나, 싸우지 않고 설득하여 되돌려보냈다.     


 ③ 단기 2,292년( BC 41년, 즉위 17년), 전국 6부를 돌며 민정을 살폈고 농업과 누에치기를 장려했다.    

  

 ④ 단기 2,294년( BC 39년, 즉위 19년), 변한이 항복해 왔다. 

     

 ⑤ 단기 2,296년( BC 37년, 즉위 21년) 수도에 금성 도성을 지었으며, 단기 2,301년( BC 32년, 즉위 26년) 금성에 왕궁 건물을 지었다.    

 

 ⑥ 단기 2,305년( BC 28년, 즉위 30년), 낙랑이 쳐들어왔다가 성 밖에 쌓여있는 노적가리를 보고 스스로 물러갔다. 적군들 중에 신교도 장수가 있어 노적가리를 보고 다른 장수들에게 “이곳 사람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가히 도의가 있는 나라다”라고 설득해 물러났다고들 하는데, 아마도 기껏 굽이굽이 백두대간을 넘어왔는데 성에 쌓인 노적가리를 보고 놀라서 공격을 포기했을 것이다.   

    

⑦ 호공이란 사람은 그 집안과 성씨가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본래 왜인이었는데, 처음에 표주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 왔기 때문에 호공(瓠公)이라고 불렀다. 


⑧ 단기 2,307년( BC 26년, 즉위 32년), 마한 왕이 조공을 요구하여왔는데, 전쟁칠 구실을 찾는 것 같아 호공을 보내 설득하게 하였다. 

 마한 왕이 “ 신라는 마한에 조공을 보내오던 국가인데 근년은 공물을 보내지 아니하니 이게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인가?” 하고 묻기에, 호공은 “우리나라는 두 성인(박혁거세·알영부인)이 나라를 세운 후, 인재가 넘치고 천시가 고르며, 창고가 가득 차고 백성이 어지니 진한의 유민으로부터 변한, 낙랑, 왜인들까지 우리를 두려워하는데, 우리 임금은 겸손하여 신하를 보내 이렇게 인사를 하니 이는 예에 지나친다고 할 수 없거늘, 도리어 대왕이 협박하시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호공은 “이에 마한 왕이 참하려 하자, 곁에 있던 신하들이 말려서 살아서 신라로 돌아왔다.”고 덧붙였다.     

 호공은 후에 탈해 이사금의 속임수로 집을 빼앗기는 굴욕을 겪는다. 석탈해가 호공의 집터가 좋은 것을 보고, 미리 숯과 숫돌을 몰래 묻어둔 뒤 호공에게 찾아가 자신의 집안은 원래 대장장이인데 잠시 다른 곳에 간 것이라 주장하고, 땅을 파면 숯과 숫돌이 나올 것이라며 한번 파보라고 했다. 땅을 파보니 숯과 숫돌이 나오자 이를 근거로 호공의 집을 빼앗았다. 훗날 이 집터에 석탈해가 신라의 왕궁이 될 경주 월성을 세웠다.

 호공은 탈해가 이사금으로 등극한 직후 대보로 임명되었다. 계림(당시는 시림)에서 닭 우는 소리가 나자 탈해왕의 명을 받고 김알지를 주워온 것도 호공이다. 재상으로서 왕의 명령을 받고 나라 밖의 일을 도맡았다고 볼 수 있다. 

 호공은 삼국사기 기록만을 따르면 장수왕급으로 장수한 인물이기도 하다. 마한에 사신으로 갔다는 기원전 20년에 최소한 10대 중후반(당시는 활동하는 나이가 현재보다 확실히 낮았기 때문에)이라고 가정하더라도 마지막 기록인 기원후 65년 김알지를 주워온 시점에는 80살을 넘는다.  

     

 ⑨ 단기 2,314년( BC 19년, 즉위 39년), 마한 왕이 죽었다. 신하들이 “ 마한 왕이 지난번에 우리 사신을 욕보였으니 지금 마한을 치자”고 했지만, 나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이용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며 따르지 않고 사신을 보내 조문까지 했다.     


 ⑩ 단기 2,328년( BC 5년, 즉위 53년), 동옥저에서 남쪽에서 성인이 태어났다는 소문을 들었다면서 사신을 보내 좋은 말 20필을 선물로 바쳐왔다.     


 ⑪ 단기 2,337년( 4년, 즉위 62년), 나는 60년 넘게 신라를 통치하다가 73세로 죽음을 맞이했다.      


( 해석 )


 박혁거세가 다스리는 동안 사로국은 한반도에서는 제법 살만한 동네였을 것이다. 

 박혁거세 탄생 시 멀리 동옥저까지 성인이 태어났다는 소문이 났고, 그 소문 덕에 전쟁을 피하거나 전쟁이 일어나도 설득만으로 스스로 물러나는 등 평화적으로 해결되고 있으며, 농업과 누에치기를 장려해 성밖에 노적가리를 쌓아 놓을 정도로 민생에 힘썼던 모습을 보아 알 수 있다. 

 특히 변한이 스스로 항복해 오고, 마한 왕이 죽었을 때 기회를 노려 쳐들어가기보다는 오히려 조문을 보내는 등의 행동은 신라가 전제 통치 국가라는 전제에서는 나올 수 없는 양상이다. 따라서 치세로 볼 때도 신라가 전제 왕정 국가가 아닌 신교 국가였고, 박혁거세는 왕인 동시에 신교의 종교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다.   

  

 박혁거세의 치세에서 호공은 함께 주목해야 할 인물이다.  

호공은 초기 신라의 건국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왜국 출신의 신라 초기의 재상으로 기록이 남겨진 인물 중 기자와 위만 다음으로 등장하는 한국의 귀화인이다. 왜국이라는 출신은 보통 일본 열도에서 온 일본인으로 해석되지만, 진짜 일본 열도 출신이 아니라 한반도 남부와 일본에서 활동하던 해상세력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해석되기도 한다. 왜구(倭寇)라는 한자어 표현이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 비문(서기 414년)의 '왜구대궤(倭寇大潰, 왜구를 크게 궤멸시켰다)'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즉 당시만 해도 왜구 즉 왜국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는 것이다. 

 호공(瓠公)이라 불린 이유는 표주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 왔기 때문인데, 호공의 집터 월성(月城)은 지금 기준으로 봐도 주변보다 땅이 높은 언덕 위고 강줄기도 가까워 집터로 좋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린이 동화책이나 위인전 등의 판본에서는 이후 석탈해가 왕이 된 후에 호공에게 다른 집을 선물했다고도 하며, 석탈해가 호공의 집을 일방적으로 뺏은 게 아닌, 역시 외국 출신이었던 석탈해가 신라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고자 호공의 집에서 살면서 그와 제휴를 맺은 것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따라서 호공이 한반도 남부와 일본에서 활동하던 해상세력 즉 어떤 한 개인이 아니라 바다를 건너 신라에 도래한 집단의 수장으로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참고로 한반도 남부와 일본에서 활동하던 해상세력에서 주목할 것이 변한에 해당하는 가야와 변진에 해당하는 이서국이다. 변한에 해당하는 가야사의 특징이 다른 삼국에 비해 문헌 기록이 매우 빈약하고 일단 가야 측이 당시에 주체적으로 남긴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과 이서국이 비밀에 싸인 국가라는 공통점이 있다. 학계에서는 호공의 박은 표주박의 박이고 혁거세의 박은 후박나무 박으로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일본사기 등 삼국사기 이전 내용에서 혁거세는 박씨가 아닌 그냥 혁거세로 등장하고, 박(朴)의 유래가 木(나무목) + 卜(점복)의 합성어이며, 박이 원래 소리글자로 후박나무 박과 표주박의 박이 혼용될 수 있다는 점으로 보아, 호공과 변한과 변진은 물론 박혁거세까지 모두가 고조선의 신교와 관련된 인물이나 나라였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삼한은 모두가 천군, 계절제, 소도 등 고조선의 유습을 이어받고 있다.

 한편, 호공의 거주지였던 양산촌(楊山村)에는 표암봉(瓢巖峯)이라는 곳이 있는데, 표(瓢)가 호(瓠)와 자형이 비슷하고 뜻이 같은 박이기 때문에 모종의 연관이 있을 수 있다. 그 외에도 일단 호공은 신라 시조 3명의 탄생에 모두 관여하는 데, 그만큼 초기 신라의 정치에서 왕권을 뛰어 넘을 만한 영향력이 있던 중요한 인물로 고조선의 신교의 교황(敎皇) 격 인물이었다는 것 외에는 해답이 없다.   

   



 박혁거세 전기를 통해 살펴볼 때 고조선의 단군이 1세대 홍익인간이라면, 박혁거세와 호공은 2세대 홍익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박혁거세의 이야기는 "한국 역사에서 삼한 시대와 삼국 초기까지의 고대 한국 역사를 국가역사로만 해석해서는 답을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즉 고대 한국의 역사는 고조선 역사를 종교역사로 해석할 때 답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박혁거세를 이야기를 끝내면서 한국사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고대 한국 역사에 대한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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