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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소년 Dec 15. 2024

귀한 오늘이다

별 일 없는 하루를 보냈다는 것에 때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곤 한다. 


느지막히 일어나 물을 마시고 빨래를 돌린다. 추운 날씨지만 잠깐이라도 문을 앞 뒤로 활짝 열어 환기를 시키고 낡은 청소기를 돌린다. 일주일간 쌓이고 내가 끌고 들어온 먼지들을 대충 쓸어내면서 점심 메뉴를 고민한다. 많이는 아니지만 꽤 자주 입에 댔던 술을 줄이니 편안한 속과 명료한 머리로 맞이하는 아침이 싱그럽기 그지 없다고 생각해 본다. 대견한 나를 칭찬하며 담배를 꺼내 무는 파렴치한 짓을 하고는 있지만.


 이런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무료한 날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어느 덧 마흔의 고개를 훌쩍 넘어서더니 이제 중반으로 치닫고 있는, 내 입으로 말 할 때면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큼 익어버린 나이에는 예정된 슬픔들이 점점 다가온다는 공포가 있다. 구태여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조금 일찍 하루를 정리하고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들 때면 의외로 말똥말똥한 정신상태 때문에 이런 저런 생각들이 머리속을 비집고 들어온다. 


나는 늘 죽음을 생각한다. 나는 밤에 잠이 들고 내일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알 바가 아닌 일이다. 세상을 떠난 이는 말이 없고 고통이 없다. 물론 그 순간은 괴로울 수도 있지만 가슴을 쥐어짜는 고통과 공포에 사로잡힐 수는 있지만 아주 잠깐일 것이다. 문제는 남은 이들의 마음이겠지.

 

그리고 나는 꽤 많은 사람들이 남기고 가는 흔적이기도 하다. 


 내가 기억하는 사람들, 나보다 먼저 이 생에서의 여행을 마치게 될 사람들. 이변이 없다면 내가 떠나 보내야 하는 사람들. 나의 아버지 나의 어머니 또 몇 몇의 나를 사랑으로 기억하는 사람들. 내가 사랑으로 기억할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의 이별 같은거..준비 같은거 아무리 해도 준비되지 않는 예정되어 있는 사건들. 돌이 킬 수 없고 물릴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운석과의 충돌 지구 종말 같은거..


 언젠가는 맞이하고야 말 사실들 그러나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겪고 싶지 않은 최대한 늦추고 싶은 일 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좀 더 버젓한 어른이 되었을 그 때까지 기다려 줬으면 하는 마음. 그래서 이따금씩 스스로 만들어낸 성적표를 보며 한숨을 쉬고 초조해 하는 나. 


 그럴 시간에 한 번이라도 얼굴을 비춰라. 전화 한 통 해라. 


 너무 쉽지만 때로 어려운 일. 


예상치 못 한 시간에 덜컥 전화라도 걸려오는 날이면 괜시레 철렁한 마음으로 응대를 하게 되고 느닷없이 떠오르는 날이면 시간 같은건 고려하지도 않고 전화를 걸어 받을때까지 엄한 발을 동동 구르게 되는 이 이상한 마음들의 정체. 


 그렇게 한동안 상념에 잠겨 지내다 무디어 지면 아무렇지도 않게 일에 파뭍혀 근근히 살아내는 시간 저편으로 스스로를 흘려 보내기 바쁜 우매하고 단순한 인간이 바로 나다. 


 기억 상실증이라도 걸린 것 처럼 먹고 사는거만 생각하다가 새치기 하듯 치달아 오는 이 문제의 상념들과 마주하면 아무 소식도 없이, 아무 일도 없이 보낸 오늘의 무료함이 너무도 감사한 것이다. 



참으로 귀한 시간이었다. 

귀한 오늘이다. 

내일도 그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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