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옛날, 내가 수학을 처음 가르쳤을 그 무렵에, 내게 아이들의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한가지 힌트, 혹은 길을 보여준 분이 계셨다. 그 분은 수학실력이 형편없던 영어 선생님이셨는데, 대체 무슨 배짱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중학생 아이에게 수학과외를 해주겠다고 하셨다.
물론 그 분이 학생이나 어머님에게 자신의 수학실력이 좋다고 사기를 치셨던 것은 아니다. 단지 학생이 선생님을 너무 좋아하고, 아이 역시 수학실력이 바닥이었기 때문에 어머님이 특별히 부탁하셨던 것 같다.
그 분은 교육적인 면에서는 나름 양심적인 분이었던지라, 자신도 열심히 중학교 수학을 공부해서 아이와 같이 수학을 가르쳤다. 곁에서 보기엔 전혀 수학적이지도 않았고, 전문적이지도 않았지만,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내 수학실력이 더 좋았을 정도이지만, 아이는 점점 수학성적이 올랐고 결국 좋은 결과를 얻었다.
곁에서 지켜본 바, 그 분은 수학을 공부해서 뭔가 체계를 갑자기 깨닫거나 한 것이 아니었다. 그 분의 실력은 여전히 형편 없었지만, 정말 자기가 모르는 수준에서 공부해서 자기가 깨달은 바를 아이와 같이 공유했다. 그리고 아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선생님이 자기와 같은 수준에서 수학을 설명해 주고 있다는 점이 매우 좋았던 것이 아닐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솔직히 말해서 그 당시 그 영어선생님보다는 수학실력이 더 좋았던 내가 가르쳤어도 그 선생님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었을 것 같지는 않다. 내가 가르쳤다면 아마도 왜 이걸 이해 못 하냐면서 아이를 갈구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아이는 아마도 더 이상 수학을 공부하지 않았겠지.
그리고 몇년후, 스카이 출신의 선생님이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것을 보았다. 이 분의 수학실력으로 말할 것 같으면, 최소한 나보다는 좋았다. 다만, 이 선생님은 본인의 머리가 너무 좋았던 터라 아이들이 왜 이해를 못 하는지 이해하지 못 했다.
설명을 이 정도 했으면, 이해해야 되는 거 아닌가?
라는 느낌이었던 것 같다. 열정적으로 가르친 것은 사실이지만, 안타깝게도 그 높은 수준의 가르침은 아이들에게 먹히지 않았다.
그리고 또 몇년후, 나는 초등학생의 수학교재로 심화문제집을 풀렸다. 왜냐하면, 내 기준에선 심화문제집을 풀고 또 풀면, 결국 심화문제집을 풀 수 있을 정도로 문제를 풀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결국 너무 어렵다고 호소하는 학생의 어머님이 내게 전화를 하셨는데, 나는 그 통화에서,
걱정 마세요, 어머님. 그렇게 어려운 문제집을 계속 풀다보면 결국 그 수준으로 실력이 맞춰지게 되어 있습니다
라고 자신있게 말했던 것 같다. 뭐 결국 학생은 그만 두었지만. 이래서 선무당이 사람 잡는 거다.
부모님들이 사교육 선생님을 선택할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은 아마도 학벌이 아닐까. 왜냐하면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선생님의 실력을 판단하는 최소한의 기준은 좋은 대학을 나올 만큼의 실력일테니까.
하지만, 위의 예시에서 본 바와 같이 학창시절 공부를 잘 했던 학벌 좋은 선생님이 아이를 성장시킬 수 있는 좋은 선생님인지는 솔직히 알 수 없다. 오히려 아이가 왜, 무엇을 어려워하는지 공감하지 못 하는 경우가 더 많아서 아이에게 화를 내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 15년 이상 수학을 가르치고 있긴 하지만, 나는 원래 언어 쪽에 재능이 있었고 영어를 수학보다 훨씬 더 잘 했다. 그래서 종종 내가 수학이 아니라 영어를 가르쳤다면 어떤 선생님이 되었을까 상상해 본다.
아마 재능이 있었던 만큼, 영어를 더 멋지게 잘 가르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하긴 하는데, 어쩌면 좋은 선생님은 되지 못 했을 것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수학의 경우는 내가 못 했던 과목이기 때문에, 가르치면서도 내가 못 했던 부분을 되짚어 나가느라 아이들의 괴로움에 공감할 수 있었던 반면, 영어는 솔직히 말해서 고등학교 당시에도 내가 왜 잘 하는지, 애들이 왜 못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 시간이 지나면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나는 결국 영어 조차도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아이들을 교육적으로 완성시키는 방식으로 가지 않았을까 싶긴 하다.
앞에서 말한 교육적으로 완성시킨다는 것은 내게 있어서 이런 의미이다.
어떤 아이들은 극히 드물지만 어린 나이에도 교육적으로 완성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기본적인 이해력, 끈기, 공부에 대한 열의 등등이 모두 갖춰져서 그저 수학적인 지식만을 전달하면 되는 아이들 말이다.
하지만 고등학생까지 포함해도 교육적으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경우 이해력도 완성되어 있지 않고, 공부를 하고자 하는 의욕도 없으며, 오래 집중할 수 있는 끈기도 없다.
이러한 교육적인 완성은 대부분 초등학교 때 이루어지긴 하는데, 내가 오랜 기간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관찰해 본 결과, 아이들이 선생님에게 얼마나 오픈하느냐에 따라 그 시기는 고등학교 3학년 시기까지도 연장시킬 수 있음을 발견했다. 사실은 오픈 정도에 따라 20대 이후도 가능하긴 하더라. 결국 교육은 긍정적인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에 변화의 의지만 있다면 죽을 때까지도 가능하지 않을까. 뭐, 조금 느리긴 하겠지만.
이런 의미에서 교육적으로 완성되어 있는 아이들에겐, 질 높은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이 매우 유용하다. 예를 들어 인터넷의 일타강사의 강의 같은 것들은 그런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적 자극을 준다.
그러나, 교육적으로 완성되어 있지 않은 아이들에겐,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수업은 교육적으로 효과를 보기가 어렵다. 그런 아이들에겐 직접 대면 수업을 해도 교육적인 효과를 보기 어려운데, 비대면 수업의 경우는 딴짓을 안 하면 다행이라고 본다.
최근에 나는 줌을 이용한 온라인 수학강의를 시작했는데, 이를 통하여 몇명의 학생을 가르쳐본 결과 교육적으로 완성된 아이들의 경우는 큰 문제 없이 수업을 받아들였지만, 교육적으로 완성되지 못 한 아이들의 경우는 그것을 목적으로 온라인 수업을 진행하더라도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 했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를 시작하는 학생들의 경우는 그 목적이 교육적으로 완성시키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내 수학수업에서는, 국어에 문제가 있는 아이들의 경우 논리퍼즐이나 추리퍼즐 같은 것을 이용하여 아이들의 국어능력을 먼저 향상시키는데 중점을 두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교육적으로 완성되어 있지 않은 단계에선, 엄청난 실력의 선생님보다는 아이를 잘 성장시킬 수 있는 선생님이 필요하다. 해당분야에서의 엄청난 지식보다, 학생이 현재 지니고 있는 문제점이 무엇인지 꿰뚫어볼 수 있고, 학생이 신뢰할 수 있는 그런 선생님 말이다.
뭐, 그 오랜 시간이 지나 깨달은 것은, 내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선생님이 그런 선생님이라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