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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묘정 Jan 24. 2022

장인과 예술가가 만났을 때

에르메스 아티스트 레지던시 <전이의 형태> 전시 리뷰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 손으로 만든 작품을 아주 좋아한다. 섬세한 표현과 많은 노동력이 들어간 작품을 실제로 보게 되면 마치 살아있는 것을 본 것처럼 잠깐 숨을 멈추고 보게 된다. 그래서 나는 장인정신을 늘 최고로 여긴다.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형태나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치열하게 지켜내는 장인의 고집과 묵묵한 수련을 존경하고 동경한다. 그런 면에서 이번 전시가 나의 취향을 저격하기에 아주 좋았다.



에르메스 아뜰리에, 그리고 아티스트 레지던시

출처 FONDATION D'ENTREPRISE  HERMES, © Tadzio

말의 안장과 마구 용품을 팔던 작은 가게에서 지금까지도 최고의 품질과 장인정신이라는 철학을 고수하고 있는 브랜드 에르메스. 이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에르메스가 운영하는 공방에 현대의 작가들을 초대하여 가죽, 실크, 크리스탈, 은세공 등과 같은 체험을 한 뒤에 작품을 구상하고 작업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체험을 마친 뒤에 작업에 대해서 구상한다는 점이다. 에르메스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티스트들이 단순히 새로운 공예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재료가 있는 환경에서 충분한 시간을 장인들과 함께 교감하는 것이다. 장인들이 재료를 대하는 태도, 어떤 형태를 만들기 위해서 해왔던 수많은 시행착오의 과정을 함께 체험하면서 자유롭게 영감 받는 것이 이 레지던시가 추구하는 부분이다.




전이의 형태(Formes du Transfert)


우리가 전시장에 가서 받는 좋은 자극 중에 하나가 뉘앙스는 알고 있지만 정확한 뜻을 물어보면 대답하기 어려운 단어들을 마주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자극 때문에 정확한 뜻을 찾아보게 되고 어떤 상황에서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게 된다. 이번 전시에 차용된 전이는 정신분석학 분야에서 쓰이는 용어라고 한다.


전이(transference)

어린 시절 기저의 욕구가 현재의 만남을 통해 현실화되는 기제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강한 영감이나 작품에 대한 구상이 현재의 만남, 즉 장인과 작가의 만남을 통해 현실화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과정을 상담자와 내담자가 상담을 통해 욕구와 감정을 해소하는 과정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서울 전시에 참여한 작가는 7명이었다. 모두 새롭게 알게 된 작가들이었지만 무료로 나눠준 도록에 그들이 살아온 배경과 작품세계가 잘 정리되어 있어서 작품을 감상하는 것에 어려움은 없었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가와 작품을 리뷰해보려고 한다.




BERENGERE HENIN 베랑제르 에냉

뷔페 - 끝나버린 축제


작품 자체가 밝고 색감이 감각적이어서 가장 눈이 갔던 작품이다. 파티가 끝난 뒤에 남겨진 가렌다와 폭죽 잔해물이 흐트러져있었다. 그녀는 즐겁지만 기간이 한정되어있는 파티가 가지고 있는 이중성에 주목하여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가 파티에서 신나고 즐겁게 놀다가 갑자기 현실세계로 돌아왔을 때 느끼는 그 커다란 격차와 약간의 허무함, 가장 극한의 감정은 언젠가는 끝이 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을 잘 표현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파티에 사용되는 가렌다나 폭죽은 일회성으로 쓰이기 때문에 화려하지만 내구성이 좋은 재질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데, 작가가 재료로 사용한 가죽이라는 묵직한 소재가 주는 느낌 때문에 표현하고자 했던 그 이중성이 더 잘 느껴졌던 것 같다.


잉어 초상화 - 자포자기한 작가의 초상화


작품 위로 손을 휘저으면 센서를 감지해서 물고기가 노래를 부른다. 뻣뻣한 몸과 뚱한 눈을 한채 입으로 “I will survive”, “Don’t worry, be happy”를 외친다. 살겠다는 의지와 희망적인 가사와는 다르게 이 물고기에게는 어떤 의지도 없어 보인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아무런 힘도 나지 않지만 입으로는 영혼 없이 희망적인 이야기를 그냥 내뱉는 모습을 물고기를 통해 표현한 것 같았다. 제목 그대로 자포자기한 그 상태일 때의 모습. 어떻게 보면 씁쓸하고 한편으로는 공감이 가는 그런 작품이었다. 심각하고 무겁게 표현될 수 있는 감정을 유쾌하고 풍자적으로 풀어낸다는 것이 그녀가 만든 작품들의 가장 큰 매력인 것 같다.




SEBASTIEN GOUJU 세바스티앙 구쥐

역광, 야자수

석양이 질 때 역광으로 어둡게 보이는 야자수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다. 장갑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검은색 양가죽에 작가가 흥미를 느끼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가죽의 처진 가장자리가 시간이 지나면서 침식되는 나뭇잎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봤을 때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작품이었다. 큰 크기와 소재에서 느껴지는 아우라도 있었지만, 실제 야자수가 가지고 있는 실루엣과 구조를 표현하기 위해서 치밀하게 작업한 흔적을 고스란히 볼 수 있었다. 대에서 이파리로 넘어가는 부분의 매듭이나 실이 박음질되어있는 모습까지 모든 디테일한 부분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작가도 관람자가 자신의 작품을 최대한 가까이에서 보고 재료를 온전히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한다.


가까이서 느낄 수 있었던 그의 디테일함

내가 이 작품이 너무 좋다고 이야기했더니 같이 갔던 언니가 나에게 물었다. 현실세계에 있는 것을 그대로 재연한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는데 너는 왜 이 작품이 좋냐고.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나도 오랜 시간 동안 생각해보았다.


나는 내가 보고 느꼈던 것을 다른 누군가에게도 똑같이 체험시켜주고 싶은 마음이 창작의 원동력이기 때문에 작가가 원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모든 디테일한 부분을 놓치지 않고 치밀하게 관찰하고 재료에 대해 연구한 흔적을 읽어내는 것이 재미있는 것 같다. 나는 놓쳤을지도 모르는 그 디테일은 이 작가는 이렇게 표현했구나, 이 재료로 이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렇게 가공했구나 하는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 작품에 더 빠져들게 된다. 누구나 아는 소재이지만 그것을 모두가 알 수 있는 것으로 전달하기 위한 과정은 정말 치열하다.


잘 둘러보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그의 또 다른 작품 「전선 위」




ANASTASIA DOUKA 아나스타지아 두카

르 콜랑 Le Collant, the thing you can't get rid of

이 작품은 신발공장에서 일하는 모든 직원의 취향에 맞춰 특별한 신발을 만드는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작가가 영국의 신발공장에서 레지던시를 하는 동안 직원들이 신발은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들에게 영감을 받았고, 그들 자체의 개성이 보이는 특별한 신발은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신발이 갖고 있는 기능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자신표현하는 정체성의 수단으로서 신발을 제작했다고 한다. 그들이 선호하는 취향을 직접 물어보고 하나하나 개성을 살릴  있는 디자인으로 제작  신발들이라 그런지  보는 재미가 있었다.


신발을 만드는 사람들의 신발을 만들어 낸 예술가. 굉장히 흥미로우면서 의미 있는 프로젝트라고 생각한다. 신고 다니기 편하고 튼튼한 신발을 만들기 위해서 직원들 하나하나가 자신의 역할에 열중하는 모습이 작가에게 영감이 되었다고 한다. 어쩌면 그녀가 신발을 통해서 표현하고 싶었던 그들의 아이덴티티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일에 대한 프로페셔널함이 아닐까.


https://youtu.be/J0h4ALRXiLQ   

그녀의 파이널 프레젠테이션 영상. 자기 신발을 보고 좋아하는 직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떤 것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내기 위해서 내 역할에 책임을 갖고 충실하게 임하는 것이 나는 장인정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감각을 예민하게 단련해야 하고 성실하게 기술을 쌓아가야 한다. 그 시간을 묵묵히 견딘 사람들이 주는 조용한 카리스마가 누군가에게는 영감이 되기도 한다.


아티스트들이 단순히 기술적인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장인들과 교감을 통해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이 이 전시가 특별하게 다가오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분야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비슷한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서로가 얻는 시너지가 더 컸을 것이다.


전시를 보러 가게 된다면 작품을 가까이 가서 보라고 하고 싶다. 가죽이라는 재료가 주는 느낌과 그들의 섬세한 스킬이 다른 전시와는 또 다른 느낌을 전달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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