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보고 아무것도 안 한 일상 기록
오늘은 저녁 8시까지 아무것도 안 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안 할 생각이었다.
집은 비었고,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유일했고 그래서 그냥 맘 편하게 누워있고 싶었다.
혼자인 집, 오롯이 뭉갤 수 있는 자유, 너무 좋다...
그러다가 예전에 사놓은 중쇄를 찍자! 만화를 e북으로 재탕했다.
중쇄를 찍자는 고정적인 수입이 안정되면 꼭 전 권을 단행본으로 사고 싶다.
책과 관련된 다양한 직업이 나오고, 그 직업이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과정이 나오며, 모두가 자기만의 직업관을 갖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보면서 늘 같은 생각을 한다. 나도 내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시간을 쏟고 싶다...
근데 내 역할이 뭔지 모르겠다... 그래서 뭘 준비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음.
분명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아니 하겠다고 했는데...아니 나 좋아하는 거는 맞나?
이런 이상한 생각이나 하고 있다.
사실 번아웃이나 슬럼프를 겪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서 누워있는 게 아니라,
뭔가를 하고는 싶은데 그게 뭔지도 모르겠고,
이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서 어떻게든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현실 자체가 부담스러운 거 아닐까.
(내 얘기임)
그럴 때마다 중쇄를 찍자를 보며 대리만족을 한다. 다양한 인물들의 고민을 보면서 공감하기도 하고, 난 언제쯤 저런 성장을 할 수 있을지 약간은 스스로를 쿡쿡 찌르는 마음을 동시에 가지면서 1-5권을 완독 했다.
1권에 대가이자 이제는 원로인 만화가(우리나라로 치면 허영만선생님?) 미쿠라야마의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인터넷에 자기를 비난하는 댓글을 보고 만화를 그만두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대목이다. 그때 이런 말을 하는데,
"데생이 망가진 것도 깨닫지 못하고 그리고 있었다는 사실도 쇼크지만... 그보다 쇼크였던 건...인간은... 생명은... 존귀하고 아름다우며 상냥함이야말로 강함이라는 걸, 진심으로 담아 그려왔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도 전해지지 않았어."
나는 항상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저릿하다. 미쿠라야마가 절망하는 그 마음이 슬픈 것이 아니라, 그가 전하려고 하는 내용이 너무 아름다워서. 인간은 존귀하고 아름다우며, 상냥함이야말로 강함이라니... ㅠㅠ 무슨 이런 아름다운 할아버지가 다 있는가.
좀 더 내 이야기로 확장해서 생각해 보면, 나도 미쿠라야마와 같은 가치관을 갖고 있다. 나는 선하고,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에 대해서 강한 믿음을 갖고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전달할 수 있는지 그게 늘 어렵다. '착해서 그냥 착한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재밌게 봤는데 이 사람이 전하려고 하는 이야기도 믿고 싶어라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그러기엔 전작은 많이 부족했다고 생각이 든다.
아직 내가 많은 장르와 이야기를 다뤄보지 못했고, 창의적이지 않아서 일 수도 있겠지만 선한 이야기를 심심하지 않게 재밌게 만드는 작업은 정말 어려운 것 같다. 악한 것이 강하다는 이야기는 자극적이거나 불쾌할 수는 있는 위험도도 있지만, 보는 사람들을 흥미진진하게 만들 수 있는 여러 가지 소재들이 많은 것 같은데... 아닌가, 내 착각인가... 그래도 나는 엄청난 힘을 가진 사람이 오롯이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해서 결국은 승리하는 이야기는 딱히 만들고 싶지 않다. 그건 내가 아니어도 잘 만들 사람도 많은 것 같고...
(결정적으로는 남들보다 좀 덜 떨어진 캐릭터를 쓰는 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남들보다 훨씬 뛰어난 캐릭터를 쓰는 것은 아예 감도 못 잡겠음.)
이 글을 쓰다가 예전에 읽고 적어둔 박완서 작가의 에세이 글이 떠올라 남겨둔다.
"우리가 아직은 악보다는 선을 믿고, 우리를 싣고 가는 역사의 흐름이 결국은 옳은 방향으로 흐를 것을 믿을 수 있는 것도 이 세상 악을 한꺼번에 처치할 것 같은 소리 높은 목청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소리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선, 무의식적인 믿음의 교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어쩌면 이렇게 어렵지도 않은 단어들로, 너무나도 잘 읽히는 아름다운 문장을 쓸 수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