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癖)이 있다. 도서 구매. 사고 싶은 책은 값의 고하를 막론하고 산다. 마나님 눈치도 안 본다. 그러나 읽지는 않는다. 그냥 살뿐. 어쩌면 소비 중독인지도 모른다. 문화 교양이란 그럴듯한 외피를 내세운. 그러면서도 고치지 못한다. 벽, 벽이다.
근 30여 년 전. 고려대학교 출판부에서 펴낸 『한국문화사대계』란 책을 구입하고 싶었는데, 구하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연히 들린 청양의 한 작은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당시로서는 고가인 20만 원을 현찰로 지불하고 샀다. 미친 행위였지만 넘치는 기쁨에 내가 미친 것도 잊었다. 지금까지 이 책을 보관하고 있다. 그러나 읽지 않았다. 퇴직 후 읽어보려 시도했는데, 문체가 너무도 지루하고 난삽해 도저히 읽을 수 없었다. 앞으로도 읽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후회 않는다. 벽은 못 고친다.
페이스북에 한형조 교수의 유작 『두 개의 논어』가 광고로 떴다. 그의 글 솜씨를 알기에, 더구나 그의 유작이라기에, 당장 사려고 했다. 그런데, 가격이 5만 원이 넘는다. 예전 같으면 좌고우면 하지 않고 질렀을 것이다. 그런데 자꾸 클릭질이 머뭇거려졌다. 5만 얼마라, 5만 얼마라…. 결국 보관함에다만 담아두고 인터넷 서점을 빠져나왔다. 아쉽다. 아, 이것이 은퇴자의 비애로구나.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 ‘여우의 신포도’를 가져왔다. 한형조 교수의 글솜씨야 익히 알지. 그러나, 그가 겨우 65세에 타계하다니, 이건 그가 평소 말했던 ‘삶의 기술’로서의 동양학을 말했던 사람치고는 너무 일찍 타계한 것아닌가. 적어도 요즘 평균 수명인 80은 넘겨야 ‘삶의 기술’로서의 동양학을 언급했던 이에게 어울리는 타계이다. 그렇다면 자기 삶의 기술도 제대로 발휘 못한 이의 책을 읽어 뭐 한단 말인가. 아니, 사서 뭐 한단 말인가. 출판사의 그럴듯한 광고 문구가 눈을 흐리게 하지만, 그건 문외한에게 해당될 일이지 나 같은 이에겐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아쉽지만, 이 책은 가격보다 저자의 평소 언행과 어긋나는 책이기에 구입할 가치가 없다!
그런데, 이렇게 ‘여우의 신포도’를 가져와도 자꾸 이 책을 사고 싶은 마음이 출렁거린다. 나는 과연 이 책을 살까, 아니면 안 살까? 나도 내 마음 잘 모르겠다.
*한형조 교수를 모독하는 듯한 발언에 분개할 분들께 사과 말씀드린다. 그저 책을 못 사는 아쉬움을 달래려 넋두리를 한 것이니, 널리 용서해 주시기를. 혹, 한형조 교수의 글솜씨를 모르는 분들을 위해 외람된 한 마디를 하자면, 그는 고답적인 동양(한국) 철학 내용을 전혀 고답적이지 않게 쓰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서양 철학서를 읽을 때의 산뜻함(?)을 맛볼 수 있다, 라고 하면 그런대로 괜찮은 평이지 않을까 싶다. 한형조 교수께 사과의 의미로 한마디 보탰다. 삼가 한형조(1958-2024) 교수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