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내가 아는 사람 Sep 19. 2023

같은 우비를 입고 93세 할머니와 산책하다

날씨가 흐릿해 곧 비가 내릴 것 같은데 우산을 챙기지 않는다. 산책 후 돌아오는 길에 물에 빠진 생쥐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안고, 남편과 난 집을 나선다. 오랜만에 일요일 아침 산책이다.


전날 내린 비로 들판은 촉촉하게 젖어 있다. 강물은 언제나처럼 유유히 흐르고 이른 아침의 공기는 예상을 빗나가지 않고 상쾌하다. 농담과 진담을 섞어가며 산책한 지 30여분 지났을까? 구부정한 허리로 할머니 한 분이 유모차를 밀고 오신다. 유모차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조금 전 강가로 내려오기 전에도 비슷한 유모차에 앉아 있던 할머니 한 분을 멀리서 보고 오던 참이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응. 반갑네!"

"유모차에 앉을 수도 있나요?"

"그럼, 짐도 실을 수 있고, 다리 아프면 앉을 수도 있지!"

"어디 가시는 중이세요?"

"응. 운동 나가. 매일 아침마다 5시에 일어나서 여기로 운동 나오거든"

"아, 그러시군요!"

"자네는 복 받을 거야"

"아침에 운동 나오면 어떤 사람들은 만날 때마다 나한테 인사를 해. 그럼 복 받을 거야 하는데, 어떤 젊은 사람들은 나 얼굴에 똥이 묻은 것도 아닌데 늙었다고 나를 피해. 난 치매도 안 걸렸고, 병도 안 걸렸는데 더러운가 자꾸 피한 다니까!"

"설마, 아닐 거예요. 왜 어머니를 피하겠어요"

"진짜라니까"


할머니에게 묻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답을 하신다. 건강함을 과시라도 하듯이 나이는 93세이고 돋보기를 끼우지 않고 실에 바늘도 끼울 수 있고, 틀니가 하나도 없는 튼튼한 자신의 이로 새꼬시 회를 먹을 수도 있다고 한다. 당뇨병도 없다고 덧붙인다. 불편한 것을 꼭 찾으라고 한다면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것과 다리가 조금 불편한 것뿐이라고. 도대체 건강 관리를 어떻게 하셨을까?


 매일 운동을 하는 건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고 운동을 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서 아침밥을 먹으면 꿀맛이라고 한다. 거기에 가족들이 먹을 거라 사과나무에 약을 치지 않고 곱게곱게 재배한 예쁜 사과를 하루에 하나씩 먹는다고 한다. 얘기를 들을수록 산책 보다 할머니 얘기가 재미있어 난 산책을 진작 포기하고 얘기에 빠져 든다. 할머니도 나와 얘기하는 걸 즐기는 것 같다.


할머니는 유모차를 밀고 난 그 옆을 아주 천천히 유모차 속도에 맞춰 걸어가며 얘기를 나눈다. 처음엔 약간의 거리를 두고 걷다가, 바짝 가까이 서서 걷다가, 서로 손을 잡다가, 결국 발걸음을 멈춘 뒤  할머니는 유모차를 세워서  앉고, 난 유모차를 마주 보며 쪼그리고 앉는다.


남편은 할머니와 나의 대화에 가끔 추임새를 넣으며 서너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강물을 내려다보며 선 채 발 운동을 하며 시간을 때운다. 재촉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이때, 할머니 마을 주민인 듯한 남자 한 분이 지나가다가 한 마디 툭 던진다.


"할머니한테 잡히면 얘기 듣는다고 못 빠져 나가요"하며 웃고 지나간다.

"괜찮아요. 저는 할머니 얘기 듣는 거 좋아해서요."


93세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할머니의 평소 생활습관은 배울 점이 많았다. 할머니는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은 최대한 먹지 않고, 운동은 꾸준하게 하며 심심할 때는 글자 공부나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직접 재배한 예쁜 사과도 그린다고.  60년 세월 동안 기쁜 일 궂은일 겪으며 따복따복 살아왔을 할머니의 집이 궁금해진다. 집 안에 정성스럽게 그려 놓은  예쁜 그림도 궁금증을 더한다.


배운 것이 많이 없음을 강조하시지만 할머니는 남을 이해하고 나눌 줄 아는 인정이 있고, 해박한 지식과 현명함까지 돋보였다. 젊었을 때는 자식들 때문에 열심히 직장에 다녔고 그 후엔 농사만 짓고 살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할머니의 말씀은 심오한 어느 철학자가 말하는 명언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깊이 있게 와닿는다. 삶의 철학이  그대로 녹아 있. 할머니는 스승이 되고 난 할머니의  철학을 귀담아듣고 있는 제자가 된다.


"남한테 뭐든지 퍼주고 잘하면 손해 볼 것 같지만 복은 천천히 와. 나중에 알아. 내가 한 것이 복이 되어 돌아온다고"

"줄 때는 자기가 못 먹는 그런 건 주면 안 돼. 벌 받아. 남한테 줄 때는 가장 좋은 걸 줘야지. 그걸 주기 싫으면 안 줘야 되고."


높은 자리에 앉은 자식이 말하길,

"머리가 하얀 사람도 나한테 꾸벅 인사를 해요"라고 말하면, 난 이렇게 말해.

"그럼 니도 받은 만큼 인사를 같이해! 그래야 되는 거야!"

"자기 보다 낮다고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면 안 돼! 니도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나가면 그냥 한 사람일 뿐이야!"

"작게 잘못한 거는 그냥 눈 감아주고, 크게 잘못한 것을 야단을 쳐야지. 크거나 작거나 아무 때나 혼을 내면 사람이라 나쁜 감정이 생긴다고!. 다른 사람에게 나쁜 감정을 갖게 하면 안 되지. 그 사람들이 앞에서는 잘못했다고 말 하지만, 뒤돌아서 욕한다고. 남들에게 욕먹는 행동을 하면 안 되잖아. 그럼 자식들에게 안 좋아"


어느 순간 할머니는 한쪽 다리를 살포시 포개더니 귀밑 짪은 파마머리를 뒤로 살짝 넘긴다. 건강하게 오래 산 사람만이 가지는 삶의 경지에 이른  여유처럼 보인다. 모든 사물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듯 다 안다는 표정으로.


한참 할머니 얘기에 빠져 있는데 우리를 지나갔던 남자가 다시 나타났다. 밭에서 감을 한 바구니 따서 나온다. 할머니는,

"이 사람들한테 감 맛 좀 보여줘 봐?"

"아, 네"

남자는 할머니와 잘 아는 사이처럼 보인다.

"이 감이 가장 예쁘고 좋네"하며 남편과 나에게 예쁜 감 하나씩을 건네준다.

"감사합니다. 제일 좋은 걸로 골라 주셨네요" 하자. 할머니.

"그럼, 줄 거면 제일 좋은 걸로 줘야지."


남편은 감을 바지에 슥슥 닦아서 껍질째 한 입 깨문다. 때마침. 강물에 비가 후드득 떨어진다.

"어머니, 인제 비가 많이 오려나 봐요. 어서 집에 들어가세요"

"괜찮아, 괜찮아 난 우비가 있어!"

"어디에?"

"유모차 안에 준비되어 있어"하며 닫혀있는 유모차 뚜껑을 올리더니 우비를 꺼낸다. 난 할머니의 노란 우비 입는 걸 도와준다. 할머니는 허리를 숙여 우비 옆에 있던 빨갛고 예쁘게 생긴 주먹 만한 사과를 꺼내더니. 나에게 건네며 선물이라며 준다.

"사과가 어머니 얼굴을 닮아 너무 예쁘네요"

"예쁘기는!" 할머니의 웃음이 이어지고 빗방울은 점점 더 굵어진다.


"어머니, 어서 집에 들어가세요. 우리도 이제 집으로 가야겠어요"

"비가 많이 오는데 어떻게 가려고?"

"남편이랑 저는 비 맞을 생각으로 일부러 우산도 안 가져왔어요"

"그래도 비 맞으면 안 돼" 하시더니 유모차 뚜껑을 다시 연다.

"자, 내가 우비 새것 몇 개씩 넣고 다니다가 우산 없는 사람들한테 하나씩 나눠주기도 해. 우리 딸이 많이 사 줬어"하면서 우비를 입으라며 내민다. 간간히 자식 자랑을 끼워 넣으시며 자식에 대한 사랑을 내비친다.

"괜찮은데. 이렇게 주시니 감사하게 입을게요. 고맙습니다."


할머니와 난 노란 두 마리의 병아리처럼 같은 우비를 입고 나란히 걷는다. 갑자기 할머니와 확 친해진 느낌이 든다. 할머니는 우비를 입어서인지 빗방울이 갈수록 굵어지는데도 집에 갈 마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난 할머니의 건강이 걱정되어 걸음을 재촉한다. 할머니와 우리 부부가 갈림길에 섰다.

"어머니 얼른 가세요. 항상 건강하세요. 다음에 또 만나면 제가 꼭 인사할게요"

할머니는 아쉬운 듯,

"저기 빨래터 알지. 우리 집이 그 앞이야. 비 안 오는 날 우리 다시 만나면 우리 집에 가서 내가 맛있는 거 줄 테니까 꼭 놀러 와. 알겠지"한다. 우리 부부는 굵은 비와 함께 집을 향해 유모차를 미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서 있다.


할머니를 보낸 뒤, 비는 점점 굵어지더니 손에 지압을 하듯이 묵직한 느낌을 들게끔 툭툭치고 달아난다. 난 우비를 입어서 옷이 젖지 않았지만 남편은 근육질의 몸 자랑이라도 하듯 옷이 몸에 딱 달라붙었다. 배에는 힘을 잔뜩 주고 있는 것처럼 몸이 딱딱해 보인다. 상의가 젖더니 점점 바짓단도 젖고 그다음 엉덩이 부분까지 비가 스며든다. 모자는 비의 무게에 축 쳐지고 바짓단도 무거운 듯 보인다. 이런 상황에 남편은 미소를 가득 머금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낭만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이렇게 비 맞고 가는 것도 좋네!" 하면서.


오늘 산책은

할머니를 만나기 위한 시간이었을까?

할머니의 우비를 얻어 입기 위해서였던 것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