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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윤 Dec 23. 2020

산책의 효용

More Than Less 기고

 우리는 저녁을 먹고 어둑해지면 밤 산책을 한다. 가던 길에 친구가 말한다. 저기가 유명한 사람이 사는 곳. 먼젓번에 내가 여기를 지나가는 데 어떤 사람이 민증을 보여 달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친구는 줄거리꾼이다. 영화 줄거리를 실제 영화보다 더 흥미진진하게 설명한다. 나는 친구의 이야기와 함께 연희동을 쏘다녔으므로, 진짜 연희동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금세 이 동네가 좋아졌다.


 본래 나는 계획된 길로 가서 그대로 돌아오는 산책자였다. 문지방을 넘고 현관을 나가 익숙한 길을 걷고 다시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온다. 방에서 방으로 향하는 산책인 셈이다. 타고난 줄거리꾼과 산책을 다니는 지금은, 그의 말을 따라간다. 집이 듬성듬성 위치한 부촌에 음산한 물건이 있다며 장희빈 우물터를 가고 전 남자친구 이야기를 구질구질 하게 하다 사러가 마트에서 와인을 산다.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떠난 산책길에서는 모퉁이에 있는 배드민턴장을 발견했다. 아빠와 아들은 박자 좋게 공을 튀겼다. 배드민턴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운동이다. 그걸 본 친구는 당근마켓을 키고, 도보 30분 거리에 채와 공 모두 파는 이웃을 발견했다. 바로 약속을 잡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로 들 어갔다. 한참 오르막길을 걷다 살짝 힘들어질 참에 내리막길이 나왔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의 꼭짓점에서 허리를 쫙 펴니 칙칙 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아가는 기차 위로 느지막이 내려오는 노을이 보였다. 고층 건물의 콘크리트 벽면에는 붉은 나무 그림자가 또렷하게 움직이고.


 며칠 전 추석에는 논과 밭과 산이 주변의 전부인 고향 집으로 내려갔 다. 어쩐 일인지 엄마와 나 단둘이 남은 명절이었다. 점심을 거하게 먹고는 산책을 갔다. 집을 지날 때마다 마당 개가 목줄을 끊을 듯이 짖었다. 엄마는 아랑곳 않고 수돗물을 가득 담은 페트병을 손에 든 사 람처럼 힘차게 팔을 저으며 걸었다. 좀 천천히 가자는 말에는 천천히 걸으면 그게 산책이니, 라는 핀잔이 돌아왔다. 엄마에게 산책이란 경 보 같은 건가. 탄력을 받은 그녀의 씩씩한 장딴지는 감나무 앞에서야 멈췄다. 곧 터질 듯한 빠알간 홍시가 위태롭게 달려있다. 감은 며칠을 걸쳐 뭉글뭉글 부풀고 태양은 한 번의 오차도 없이 그 자리의 나무를 비춘다. 문득 사람의 움직임이 쓸모없어 보였다. 타지로 갔다가 가끔 돌아오는 나는 엄마의 빠른 걸음은 알지만 내 느린 걸음을 모르고 빛 에 붙들리는 법도 모른다. 엄마는 홍시를 반으로 갈라 한쪽을 건넸다. 동글한 알맹이를 호로록 빨아 마시고, 남은 껍질과 씨는 땅에 뱉었다. 둘은 거기 계속 가만히 있다가 흙이나 나무가 되려나. 집에 다다랐을 무렵 손에는 홍시가, 바지의 양쪽 주머니에는 밤과 대추가 알알이 들어있었다.


 혼자 나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오는 사람이 함께 나갔다가 이고 지고 오는 법을 배운다. 칼로 책등을 자르는 것처럼 거칠지만 그 속에서 두터운 이야기가 솟아난다. 배드민턴을 통통 치다가 공이 나무 속으로 쏙 숨어버리는 것 마냥, 분명 대추를 베어 물었는데 사과 맛이 나는 것 마냥 마법 같다. 나는 여전히 집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산책자 인데 가끔은 목적지를 잃어버린 방랑자처럼 구불구불하고 싶다. 언제 만날지 모르는 노을을 향해 발을 내디디고, 열매를 따기 위해 잠깐 멈 추는 법을 알고 나서부터 그랬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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