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몽블랑 : 폭우 속 내리막, 와인 속 알프스
아침 8시 전에 시작된 오르막 산행은 10시쯤 되자 프랑스에서 스위스로 넘어가는 산의 정상에 도착하면서 끝이 났다. 프랑스와의 이별이 아쉬워 헤어짐을 알리는 이정표 아래에서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다시는 볼 수 없을 프랑스 쪽 알프스 풍경을 눈에 담기도 하고,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하늘을 올려다본 가이드가 날씨가 심상치 않으니 넣어둔 판초와 가방 싸개를 꺼내라고 했다. 길동무들의 가방 안에서 작지만 펼치면 커지는 산행용 물건들이 화수분처럼 쏟아져 나왔다. 가이드는 가방이 젖으면 무게가 두 배가 되고 말리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니 가방을 단단히 싸라고 조언해 주었다. 방수 커버와 멕시코 원주민들이나 입을 것 같은 회색의 판초를 야무지게 걸친 산악인들과 달리 흐물거리며 바람이 불면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한 부실하기 그지없는 싸구려 우비를 들고 온 내가 너무 한심해 눈물이 났다. 짐은 여행 내내 또 하나의 도전이었다. 침낭과 갈아입을 위아래 여벌의 산악 옷 그리고 잠옷을 겸한 저녁에 입을 편한 옷 외에는 딱히 무엇을 추가하지도 빼지도 않았다. 하지만 애물단지처럼 힘껏 쑤셔 넣어도 안 들어가는 슬리퍼 때문에 난감한 상황이 짐을 풀고 쌀 때마다 계속 이어졌다. 짐 풀기가 두려울 지경이었다.
첫날의 오르막 길은 몽블랑의 위력을 실감하게 했다면, 둘째 날은 폭우 속 1,000미터의 내리막이 시위하듯 다가왔다. 차라리 눈이 내렸으면 했다. 땀이 비처럼 내리니 눈이 더 나을 것 같았다. 대충 둘러 입은 싸구려 우비를 벗자니 비가 들이쳐 가방 안의 물건이 젖을까 걱정되었고 입고 있자니 한증막에 옷을 입고 들어간 듯 땀에 젖어 끈적거렸다. 산악인들도 내리막은 오르막보다 더 힘들다고 한다. 쉬지 않고 한 번에 내려가야 힘이 덜 든다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남긴 뒤 가이드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바람돌이 가이드의 꽁무니가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기도 했지만 서두르다가 더 큰 사고가 날까 두려워 천천히 내려가는 걸 선택했다. 너무 힘을 주고 내려온 탓인지 몸에 무리가 갔는지 다리는 후들거리고 온몸이 쑤셨다. 내리막길에서는 적당한 쉴 곳도 점심을 먹을 장소도 찾기 어려웠다. 같은 눈높이에 있었던 알프스 산이 올려다보아도 더 이상 봉우리가 보이지 않기 시작하자 평지에 도달한 것을 알았다.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고 허기가 몰려왔다.
도착한 곳은 라 꺄프(La Caffe)라는 지역으로 숙박 시설이 없었다. 우리 일행은 버스를 타고 시내에 있는 호텔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다음 날 버스를 탔던 장소로 돌아와 다시 산행을 이어갈 예정이었다. 버스는 한 시간 간격으로 운행되었고 다행히 우리의 도착 시간과 버스 시간이 얼추 맞았다. 몽블랑임을 감안해서 비용이 좀 비쌀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가격은 비싸다 못해 사악했다. 주섬주섬 16프랑씩 지불하고 213번 버스를 탔다. 승천하는 용의 몸통처럼 구불구불한 알프스 산맥의 좁은 2차선 도로를 10년 이상은 운전했을 법한 기사님은 우리가 착석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산행 중 보았던 알프스의 옆모습을 이제 다른 각도에서 올려다보니 초록은 더욱 짙어져 푸르름을 넘어 푸른색을 띠었고 만년설은 한층 더 시리게 느껴졌다. 급경사와 급회전이 이어지는 도로는 어지러웠지만 360도 다른 각도에서 알프스를 바라보는 즐거움을 선사했다. 16프랑짜리 40분간의 ‘몽블랑 용틀임 회전 투어’가 마음에 들었다.
두 번째 숙소인 스탠드 마흐띠네 (hotel de stand Martigny city center)는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무인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모텔에 가까운 소박한 호텔이었다. 프랑스에서 스위스까지의 구간은 짐을 운반해 주는 포터 서비스 이용이 가능했다. 다만 성수기에는 최소 6개월 전에는 예약을 해야 했고 몽블랑 전 구간에서 포터 서비스가 제공되는 건 아니었다. 예약에 실패한 우리는 직접 짐을 메고 산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벅찬데 가방까지 메고 잘 갈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길동무들이 내 가방의 무게를 가늠하려 들어보더니 “어차피 이런 소풍 가방은 포터 서비스도 안 받아줄걸?’’이라며 장난스럽게 놀렸다. 호텔 안내 데스크에는 직원 대신 한 대의 컴퓨터가 있었다. ‘오늘 산행은 힘들었나요? 좋았나요?’라는 사람의 온도가 담긴 말 한마디가 위로가 되는 지역었기에, 기계의 정확하지만 딱딱한 응대가 차갑게 느껴졌다. 무인 호텔이라 편리한 점도 있었다. 햇반과 컵라면을 눈치 안 보고 먹을 수 있는 작은 자유가 그러했다. 남은 일정을 고려하여 누룽지와 진미채를 먹을지, 김과 햇반을 먹을지 고민하는 순간조차 나름의 즐거움이었다. 1층 카페테리아에서 간단히 허기를 해결하고 방으로 돌아와 비에 젖은 양말부터 속옷까지 전부 빨아 널었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며 남은 산행 중 다시 누릴 수 없는 호사를 만끽했다.
남은 날들의 저녁은 쉼터에서 간소하게 해결해야 했기에 오늘만큼은 특별한 만찬을 즐기기로 했다. 정장 차림으로 가야 할 것 같은 레스토랑을 예약했지만 우리의 복장은 여전히 등산화와 등산복이었다. 비가 갠 뒤 더욱 선명해진 노을빛에 물든 알프스 산, 문명화된 도시의 반짝이는 불빛, 그리고 와인 잔에 비친 알프스. 말끔한 슈트를 입은 손님들 사이에 어색하게 섞여 있었지만, 그 또한 우리의 순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저녁이었다.
* 길동무들의 닉네임
바람돌이 가이드 : 사라지는 게 주특기. 금방 사라지고 금방 나타남.
빨래남 찍사 : 어디를 가든 빨래부터 함. 마르지 않아서 대략 난감. 사진에는 진심임.
산다람쥐 짐꾼 : 모든 음식이 들어있는 가방을 메고도 산악 에너지의 절반만 씀. 후방에서 애물단지를 몰고 다니는 쉽독(Sheep dog) 역할. 1인 2역
애물단지 어.몽 (어쩌다 몽블랑) 비타민 : 두고 가자니 아깝고 데리고 가자니 힘든 1인. 저녁 식사를 놓치지 않으려 초인간적 에너지를 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