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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발트 Apr 28. 2020

나이킹 유모차를 몰던 엄마

이제는 제가 모는 차에 편히 타셔요


 켜켜이 쌓인 오래된 사진첩에서 바스락 거리는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오빠와 나도 이런 시절이 있었구나- 생각하니 웃음부터 나왔다. 자세히 보니 영어 글씨가 눈에 띄었다. 짝퉁 브랜드를 더 선호하던 그때, 유모차마저 나이킹이였다. 대부분 20대 중반이면 결혼을 하던 때이니, 부모님의 나이는 서른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의 세대라 직접 가게를 방문해서 고르고 골랐을 엄마와 아빠의 젊은 시절을 잠시 떠올려본다. 





 유치원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아빠는 직장을 나가시고, 엄마는 집에서 어린 자식 둘을 키웠다. 살림살이가 빠듯했기에 잦은 이사를 다니며 반지하 방을 전전했는데 아기였던 내가 혼자 누워 있을 때 좀도둑이 든 적도 있다고 했다. 아기가 울까 봐 이불로 덮어 놓은 채 물건을 훔쳐 달아났다고 하는데 참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렇게 사진기와 라디오 등 모든 돈 될만한 것들이 사라지던 80년대에 나는 태어났다. 


 형제가 많은 집안에서 태어나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동생들과 집안을 위해 돈을 벌어야 했던 엄마는 결혼을 하고 우리를 낳은 후에도 계속해서 책임이란 두 글자를 어깨에 이고 지냈다.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던 아빠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였기에 부모님은 서로를 의지하며 가정을 일궈냈다. 내 또래 친구들의 부모님들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부모님은 한 번도 쉬지 않았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엄마와 아빠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오로지 사진으로 기억할 뿐이다. 맞벌이로 힘들게 우리를 키운 덕분에 평범한 가정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지만 커가면서 나는,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 분명 딸인 나처럼 엄마도 스스로 원하는 것이 많았을 텐데 후회는 없었을까. 가족의 울타리에서 항상 행복했을까. 우리의 모습을 남길 때,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기억될지 알았을까? 


 모든 딸들이 그러하듯이 엄마를 잘 이해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럴수록 둘의 애착관계는 깊어져서 서로를 걱정하는데 그치지 않고 점차 동일시하게 된다. 항상 고등학생에서 머물러 있을 것만 같은 내게 어른이 됐다는 신호를 알려준 것은 엄마와의 관계에 있었다. 나는 언제나 엄마의 감정을 대신 받아냈다. 눈에 고인 엄마의 슬픔을 삼켜주고, 입가에 걸친 웃음을 담으며, 가슴에 맺힌 아픔을 덜어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효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어른이 된 나를 다시 거꾸로 데려다 줄 뿐이다. 엄마는 자신의 감정을 딸에게 물려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르다. 가족의 관계에 있어 반드시 연결되어 있는 존재지만 서로를 종속시켜서는 안 된다.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되, 독립적인 인생을 지지해 주어야 한다. 각자의 삶을 누구의 탓으로 돌려서도 안된다. 나는 이제 엄마와 딸의 관계에서 수평적인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한다.






 환갑을 넘긴 엄마가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다. 25년이 넘은 미싱사의 직업을 벗고 요양보호사 시험을 치르게 된 것이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비록 여전히 고된 일을 하고 계시지만 앞으로 몇 년간은 더 일을 하고 싶어 하신다. 가만히 있는 것이 더 힘들다는 엄마의 말을 믿기로 한다. 그리고 나는 9년간의 장롱면허를 벗어나 초보운전자가 되었다. 가끔씩 햇살 좋은 날, 엄마와 함께 드라이브를 하며 근사한 카페에서 차를 마신다. 함께하는 이 시간들이 소중하고 행복하다. 이제는 서로의 눈과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장면을 담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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