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가일기 #10
밤새 나를 힘들게 한 악몽과 미처 확인 못한 불편한 이메일 두통을 확인하는 것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지난주 해고로 인한 관련 일처리를 하면서 과거의 고통스러웠던 기억 버튼이 눌렸고 몸과 마음이 자연스레 당시 기억처럼 행동하고 느끼기 시작하더니 최근 잠잠해졌던 불안 증세가 시작되었다.
그래도 감사일기 덕분에 현재에 머무르는 힘이 강해져 예전 같으면 하루종일 그 기억에 압도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고 하루종일 과거의 기억을 곱씹으며 불행 회로를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증상에 힘들 나를 위한 일들을 찾아 스스로를 돕고 중간중간 행복도 찾고 감사함으로 하루를 마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세수하는데 급기야 가슴 두근거림을 넘어 가슴이 죄어 오더니 납덩이처럼 딱딱해지고 명치 통증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별일 아니듯 당황하지 않고 하던 세수를 마저 하고 내 최애 닥터지도 얼굴에 찹찹 발랐다. 그리고 이제는 자동적으로 이런 일이 생겼을 때 머릿속으로 '세수하는데 심장이 뛰고 가슴 명치 통증이 있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최대한 할 일에 집중하며 나를 도울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라고 감사 일기 항목을 만들어 되뇌었다.
나는 보통 아침 루틴으로 세수를 하고 나면 거울을 보며 아침 확언을 한다. 증상에 아무렇지 않다는 듯 세수를 천천히 여유 있게 하고 거울을 보며 확언을 하려는데 급기야 숨까지 가빠오는 것이다. 마치 달리기를 한 것처럼 말이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몸을 바로 움직여 가까운 현관으로 가 문을 열고 찬 바람을 한 번 쐬었다. 그리고 현관 앞 거울 앞에서 Yuri Kim (김유리 ICF ACC, SCPC) 코치님과 Cathy K님께서 알려주신 호흡법이 생각나 호흡을 천천히 했다. 그리고 확언을 마저 이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당황하지 않을 수 있던 이유는 딱 두 가지다.
1. 이 증상을 일으킨 원인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2. 이 증상은 나를 죽일 수 없고 이는 곧 지나갈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
병가를 냈던 초기에는 저 두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내게 왜 공황증세가 생겼는지 어떤 경우에 증상이 오거나 패닉 어택이 오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인생에 단 한 번도 겪지 않았던 증상이라 공포감이 심했고 곧 죽을 것 같은 느낌에 랜덤으로 증상이 오는 거 같았으니 불확실함과 공포 그 자체였다.
사람은 누구나 불확실함과 희망 없음 앞에서 무너진다.
원인을 도무지 알 수 없고 무작위로 찾아오는 증상에 온 신경이 예민해지고 곤두서기에 불면증도 심해지고 잠을 자지 못하니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다. 거기다 공황장애 약은 몸무게를 6개월 만에 15킬로가 불게 만들어 자연스레 사람 만나는 것을 꺼리게 된다. 약기운에 늘 정신은 몽롱하고 각종 부작용에 점점 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곤욕스러웠던 것은 약을 먹기 전에는 적어도 생각과 판단이 가능했던 것이 이마저도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하루를 살다 보면 논리를 요구하는 크고 작은 일을 결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오늘 하루 장 볼 목록을 작성한다 치면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고려해 그날의 메뉴를 짜는 그런 일들 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뭔가 생각을 하고 판단을 하려고 하면 금세 몽롱해지고 머릿속이 안개로 가득 차 내가 멍청해지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 사지가 멀쩡한데 눈에 안 보이는 병마와 싸우다 보니 하루종일 누워서 아무것도 못할 때 내가 게으른가 싶기도 하고 사람을 피하게 되다 보니 과거에 사람들과 어울렸던 모습을 생각하면 한없이 자괴감이 든다. 이제는 나라는 사람이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고 생각하게 되고 이런 상태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자연스레 희망을 잃게 된다. 사람은 희망과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으면 당연히 삶에 의미도 없어진다. 이렇듯 공황장애로 시작한 병은 극심한 우울증도 함께 따라온다.
병가 기간 첫 1년간은 시간과 약에 의존했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는 것을 깨달은 후 여러 치열한 시도와 고군분투했던 시간을 통해 불확실함과 희망 부분을 해결했다. 특히 불확실함, 앞서 언급한 두 가지 - 증상을 일으킨 원인과 그 증상의 결과- 을 해결한 덕에 증상이 와도 이제는 무섭진 않다. 보통 증상에 공포감이 더해지면 증상은 더 심해질 수밖에 없고 심해지면 당황하고 이는 패닉 어택 엔딩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공포감을 없애기 위해서는 증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초기에는 이 증상이 너무 싫고 원인을 모르니 무섭기만 했다. 무엇보다 나는 이 증상을 거부하고 싶었다. 내가 얼마나 운이 없는지 왜 이런 증상을 겪는지 억울하기만 했기에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제는 이 증상을 겪고 있는 나를 받아들이고 그 자체로 나를 사랑한다. 오히려 이 증상을 겪고도 잘 살고 있는 내가 대견스럽기까지 하다.
그리고 증상에는 일체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보통 우리 인간관계에서도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마주하면 그 사람을 싫어하거나 피하려고 하면 이상하게 그 사람과 더 엮이는 일들이 많은데 이때 오히려 무관심으로 일관하면 신기하게도 그 사람과 나쁘지 않게 자연스레 멀어지게 되는 것처럼.
오늘 아침 나는 증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증상에는 무관심한 태도를 유지하며 내 할 일에 집중했다. 그러면서도 증상에 힘든 나를 돕기 위해 숨이 가빠오는 것을 보고 현관문으로 가 상쾌한 공기를 마시기도 하고 호흡을 연습하며 속으로는 계속 감사함을 찾아 되뇌었다. 나를 최대한 돕되 증상 자체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하던 아침 루틴에 집중했다. 심지어 빨랫감을 가져다 세탁기에 집어넣는 일도 했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따뜻한 레몬티를 마시며 숨 고르기를 하니 이내 증상은 잦아들었다.
#라이팅게일 #병가일기 #이또한지나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