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마음에 여유가 넘치는 수요일, 행복하게 시작하셨나요?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한 작가 #라이팅게일 입니다.
제 오랜 독자분이라면 아시겠지만, 저희 가족은 다문화 가정입니다. 첫 번째 결혼에서 아이를 얻었고, 우연히 여행 온 캐나다에서 인생의 사랑을 만나 새로운 가정을 이뤘습니다. 저희 세 식구 모두 다른 성(Last name) 덕에 함께 국경을 넘을 때면 셋이 어떤 관계냐고 묻곤 하지요.
가끔 이런 질문들을 받곤 해요.
"아이가 이혼 과정에서 상처가 있었을 텐데 어떻게 새로운 가정에 적응하고 그 시기를 극복했나요?"
저는 정직함과 자율성 덕분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아이가 만 4세가 되던 해 이혼 소송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고등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일 특성상 출근 시간도 빠르고 늦게 퇴근하는 날이 많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기간제 교사라는 불안정한 위치와 특히 교사 월급만으로는 아이를 온전히 책임질 경제적 능력도 없었기에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아이를 맡겼습니다.
다행히 아이는 부모님께서 지극정성으로 돌봐주신 데다가, 특히 아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한 학년에 한 반으로 10명이 채 되지 않은 아주 작은 규모의 특별한 학교였어요. 작은 인원이지만 건물 규모는 여느 초등학교와 다르지 않아 여유로웠고, 심지어 추운 겨울이면 전기가 들어오는 따뜻한 바닥에 앉는 음식점처럼 1학년 교실 한켠에는 구들방처럼 앉아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 수 있는 공간도 있었습니다. 거기다 준비물은 학교에서 모두 준비해 주고, 개인 사물함에는 자기 키만 한 겨울 코트를 걸어둘 정도로 넉넉한 사이즈의 행거와 책꽂이가 있었습니다. 열정적인 교장 선생님 덕에 전교생 1인 1악기로 현악 오케스트라에 참여하도록 했는데, 덕분에 딸아이는 그때 시작한 비올라를 올해로 9년째 캐나다에 와서도 지역 오케스트라에서 활동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당시 제가 근무하던 고등학교는 8학군에 위치해 있어 극심한 경쟁을 최전선에서 바라보며 저의 어린 시절보다 더욱 정교해진 입시제도에 회의감을 느끼던 터라, 아이가 한국에서 좀처럼 경험하기 어려운 특별한 환경에 있다는 사실이 참 감사했습니다. 학생과 교직원 모두 100명이 안 되는 작은 학교이기에 전교생이 모두 아는 것은 당연하고, 이따금씩 아이를 데리러 가면 낯선 다른 학년 학생이 불쑥 제게 인사하며 "00 엄마시죠? 안녕하세요!"라는 활기차고 기분 좋은 인사를 받곤 했습니다. 전교생이 가족이나 다름없다 보니 선배 언니 오빠들의 챙김을 받거나 후배 동생들을 챙기는 문화 덕에 정서적으로도 안정되고 충만한 시간을 보냈고, 아이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정이 해체되고 상처가 될 수도 있는 그 시간을 행복하게 추억한답니다.
물론 아이가 마음고생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만 4살에 아이를 부모님 댁에 맡기고 다시 데리고 나오기까지 꼬박 7년이란 시간이 걸렸거든요. 어린 아이가 부모 없이 7년 동안 떨어져 지낸다는 사실에 당시 제 마음은 늘 피눈물로 얼룩졌습니다. 그래도 그 덕에 사춘기를 한창 보내고 있는 아이와 저는 사이가 좋습니다. 힘든 시기를 함께 이겨낸 전우이자 서로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 시간이 있어 남다른 애틋함이 있거든요.
7년 동안 꾸준히 아이에게 받은 질문이 있습니다. 주말에 아이를 보러 내려가거나 방학 때 아이와 함께 서울에서 시간을 보내고 헤어질 때면 우리가 왜 함께 살 수 없냐는 질문과 함께 엄마랑 서울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죠.
그 질문에 저는 늘 이렇게 대답했어요.
"00야, 진짜 속상하지? 엄마도 그래. 엄마도 매일 00 보고 싶고 함께하고 싶어. 지금 상황에서 우리에겐 두 가지 선택이 있어. 하나는 엄마와 함께 서울에 있는 거고 다른 하나는 지금처럼 할머니 댁에 있는 거야. 서울에 함께 있을 시나리오를 알려줄게. 엄마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일찍 시작해서 늦게 끝나. 그 말인즉슨 00가 자는 시간에 엄마는 학교에 갈 거고 늦게 들어오게 될 거야. 그럼 00는 돌보미 선생님이 챙겨주거나 늦게까지 엄마를 혼자 기다려야 할 거야. 아니면 학원에 갈 수도 있겠지. 지금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우리 00 밀착케어 해주고 좋아하는 학교에 다닐 수도 있어. 지금 떨어져 있는게 속상하지만 각자 위치에서 열심히 살면되. 엄마가 지금 우리가 함께 하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고 그 날이 반드시 올거야. 엄마는 00가 원하면 서울로 언제든 데려올 수 있어. 그게 00가 원하는 거야? 00가 생각해 보고 엄마에게 알려줘."
7년 동안 같은 질문이 계속되었고, 저는 같은 대답을 해줬습니다. 아이의 선택도 늘 같았습니다. 덕분에 아이는 학교생활에 집중하며 안정적인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부모로서 아이에게 힘든 상황을 만들었다는 죄책감은 논외로 하고, 그 상황을 피할 수 없다면 아이에게 최대한 이 상황을 설명하고 선택권을 주는 것, 이것이 비결이었어요. 사람은 아이건 어른이건 억지로 그 상황에 놓이면 힘들지만, 선택이 가능하다면 그 상황이 다르게 보이죠. 저 또한 제 어린 시절 부모님과 저의 관계를 통해 그 사실을 힘들게 배웠습니다.
아이에게 늘 좋은 것만 주고 싶지만 때로는 그렇지 못할 여건에 놓이기도 합니다. 당시엔 아이에게 굳센 모습을 보였지만 마음이 내내 아팠는데 이제는 돌이켜보니 부모의 보호하에 미리 고난을 극복해보는 연습을 해 본 좋은 기회였습니다. 아이와 힘든 상황을 함께 의논하고 자율성을 주어 함께 극복한 시간은 아이에게도 제게도 이제는 상처가 아닌 좋은 성장의 시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이 계시다면 다 잘 될거란 말씀 드리고 싶어요. 마음 가득 응원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한국은 오늘이 벌써 수능 예비 소집일이네요.
모두 모두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바랄게요.
늘 감사합니다.
#라이팅게일 #청소년육아_2
#상처가아닌 #성장의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