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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Jun 30. 2023

오해입니다

영화<랑종>과 공포영화, 그리고 세계문학

 책 욕심이 많은 나는 책을 아끼고 소중히 다룬다. 한쪽 벽을 답답하게 가득 채운 수많은 책 중에서 손때를 타 옆면이 변색된 것은 소수에 불과하다. 여러 번 읽어 자연스레 더럽혀진 책 중 가장 비중이 큰 시리즈가 세계문학 전집이다. 절대다수의 사람들로부터 세기를 걸쳐 사랑받아온 작품들. 그런데 왜인지 자꾸 내 취향은 ‘마이너’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특히 영화 이야기를 할 때 그런 오해를 많이 받곤 한다. 아리 에스터의 <유전>과 <미드소마>가 너무 좋아서 두 번 이상 보았다는 사실을 언급하거나, 구라사와 기요시의 <큐어>나 나홍진의 <곡성>이 정말 잘 만든 영화 같다는 의견을 밝히거나, <파라노말 액티비티>와 <블레어 위치>가 신선한 충격을 주는 재미있는 작품이었다는 감상평을 남길 때. 그리고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과 로만 폴란스키의 <악마의 씨(로즈마리의 아기)>가 내 인생에서 손꼽히는 작품 중 하나라고 강력 추천할 때, 상대방은 내가 공포 영화를 좋아한다고 오해한다.

 어제는 드디어 이 영화를 보고 싶다고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다고 혼자 보기에는 무서워서) OTT 플랫폼에 풀리기를 기다려왔던 작품 <랑종>을 보았다.


*<랑종>의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조상 대대로 바얀신을 모시는 랑종(무당) ‘님’이 귀신에 씐 조카 ‘밍’을 지키려 노력하는 내용이다. 밍의 아버지 야산티아는 대대로 지나친 살생을 저질러온 가문 출신이다. 밍의 어머니 노이는 원래 바얀신의 선택을 받았으나, 부적을 쓰고 성당을 다니면서 적극적으로 신내림을 거부했다. 결국 밍은 죄가 많은 가문의 딸로, 빙의에 용이한 무당의 피를 이어받았으나 신의 보호는 받지 못하는 운명으로 태어났다. 그래서 그녀는 조상이 저지른 죄의 업보로 수백, 수천 개의 악령에 씌었다. 조상이 밟아 죽인 개미와 지네부터, 고기를 팔기 위해 잔인하게 도살해 온 개, 방직 공장에서 착취한 어린이들의 혼령까지 모두 밍을 갉아먹어 악귀로 변모시켰다. 님과 노이는 밍을 지키기 위해 퇴마의식을 준비하고 고군분투하지만 결국 모두 밍의 악귀에 살해당한다. 밝고 예쁜 20대의 밍이 점차 악마로 변해가는 과정이 현실적으로 느껴져 소름 끼쳤다. 첨단과학 시대에 여전히 뿌리내리고 있는 샤머니즘의 견고함과 설득력이 놀라웠다.

 마지막에 밝혀지는 ‘님에게 진정으로 바얀신이 내려온 적이 없다.’는 반전은 인간이 가지는 맹목적이고 비논리적인 믿음이 이성과 논리의 세계에서 샤머니즘이 힘을 발휘하게 하는 근간이라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이렇듯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소재가 공포스러울 순 있어도 주제가 공포인 것은 아니다. 나의 시선에서 <랑종>과 <유전>은 자연주의 문학 같다. 가문의 저주로 영매의 혼을 가지고 태어난 영화 속 인물들은 끝내 거대 운명을 거스르지 못한 채 패배한다. 토마스 하디의 <테스>와 <무명의 주드>, 스티븐 크레인의 <메기>의 주인공이 겪는 운명과 똑 닮았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삶을 개척하지 못한 채 조상이 만들어 물려준 환경, 유전적 기질, 타고난 본능에 철저하게 굴복한다.

 <악마의 씨>는 페미니즘 문학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가 떠올랐다. 내가 품고 있는 아기에게 느끼는 두려움과 생경감. 배속에서 요동치는 생명체가 주는 이질감과 고통. 자신이 낳은 괴물을 사랑해야 한다는 ‘모성 신화’가 주는 압박감. 이 모든 것이 영화에 그대로 담겨있기 때문이다.

 <샤이닝>은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처럼 진정한 공포와 광기는 내 안에 잠들어 있는 분노, 욕망, 질투, 열등감에서 비롯된다는 걸 보여준다. <큐어>는 이런 ‘악’의 근원이 모든 인간의 심연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이 한순간에 모두 공포스럽게 변하는 과정과 순간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마치 호손의 <영 굿 맨 브라운> 속 브라운 씨가 야행을 떠나 숲 속에서 벌어진 ‘악의 축제’에서 아내 페이스를 목격한 후 믿음이 부서지고, 이 세상의 모든 ‘선’을 의심하게 되어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던 것처럼.


 조만간 가운데가 내려앉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드는 책장을 보고 있으면 손때가 묻은 것을 너머 책등이 무너진 책이 눈에 들어온다. 대부분이 부드러운 종이 커버로 제본된 페이퍼백 원서로, 책등이 꺾여 셀 수 없이 많은 줄이 생겨나있다. 원어 그대로를 느끼고 싶어 구절구절 밑줄까지 치며 여러 차례 뜯어 읽은, ‘나의 탐식’이 묻어 나오는 책은 필립 K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 멜빌의 <모비딕>, <에드거 앨런 포우 단편선>과 <네서니엘 호손 단편선>, 그리고 해리포터 시리즈다. ‘귀신’ 비슷한 존재가 등장하는 소설들이 대다수라는 점은 인정한다.

 그럼에도 확신한다. 오해를 풀고 싶다. 나는 호러를 좋아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공포를 마주하도록 몰아붙이는 -귀신이 피를 흘리며 어두운 곳에서 불쑥 튀어나오고, 미친 살인마가 전기톱을 들고 갑작스럽게 돌진하여 나의 심장을 떨어뜨리는- 영화는 싫다.

 나는 각성효과가 뛰어난 메타포를 사용한 작품에 매력을 느낀다. 진정한 두려움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작가가 자신의 철학을 직접적이지 않으면서 지금까지는 없었던 신선한 자극으로 포장해 보여주는 장르가 좋다. 그래서 마치 내가 호러작품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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