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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Jul 26. 2023

용감하다

영화 <조조 래빗>, <서스페리아>

 영화 <조조 래빗>을 보고 난 후 한동안 엄마의 신발 끈을 묶어주던 어린 조조의 모습이 떠올라 콧날이 시큰해지며 눈물이 고였다. 사실 나치와 박해받는 유대인을 다룬 영화를 볼 때면 늘 울었다. 딱 한 영화, <서스페리아>를 제외하고. 일반인을 현혹하는 나치즘과 이에 따른 피해자를 다룬 두 영화는 서로 닮았지만, 놀랍도록 다르다. <조조 래빗>은 히틀러가 유니콘 고기를 먹는 코미디지만, <서스페리아>는 현실에 남은 나치의 잔당이 마녀로 상징되는 공포영화다. 두 영화의 강렬한 대조가 흥미로워 퇴근하고 돌아온 거북이 씨에게 감상을 쏟아내듯 조잘거렸다. 마음이 급해 함께 아기를 씻기면서. 화장실이 내 목소리로 웅웅 거렸다. “그러니까, 비슷한 본질에 극단으로 다른 형태의 두 영화야.” <조조 래빗>을 재미있게 본 거북이 씨는 나의 흥분과 말발에 영업 당해 그날 밤 <서스페리아>도 보았고, 아주 기겁을 했다. 무고한 소녀들이 내장을 쏟고, 온몸의 뼈가 뒤틀려 죽는, 붉은 피의 향연인 영화를 보면서. 그리고 옆에서 태연하게 그 잔인한 장면을 또다시 보고 있는 나에게 거북이 씨는 말했다. “너 용감하다.”


JOJO RABBIT

 ‘용감하다’라는 평범한 말이 매우 생경하게 다가왔다. 생각해 보니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평가다. 언제나 내 캐릭터는 겁쟁이, 쫄보, 소심쟁이 였다. 실제로 나는 무서운 게 너무 많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벌레와 곤충. 냉장고 신선 칸에 넣고 한 달 후에 기억난 물컹하게 변했을 오이. 엘리베이터가 연결되지 않고 천장이 낮은 지하주차장. 모두 퇴근한 뒤에 어둠에 집어삼켜져 끝이 확인되지 않는 학교 복도. 부모님과 연락이 닿지 않는 만 하루의 시간. 새벽에 울리는 전화벨. 커다란 풍선. 롤러코스터. 그리고 비난과 비판. 그래서 나는 안전한 글을 쓴다. 보고 듣기에 좋은 내용을 담고, 논쟁을 일으키지 않을 만한 주제를 주의 깊게 고른다.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도, 내가 쓴 글로 비난받는 것도 두렵다. 황희 정승처럼 깊이 있게 세상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너도 옳고, 그도 옳고, 아마 나도 옳은 것 같아.’의 글을 쓴다. 


 비밀 인스타그램 계정이 있다. 임신을 계기로 휴직을 하며 학생 때부터 직장인 시절까지, 실질적으로 ‘평생’을 유지해 온 ‘8 to 7’의 루틴에서 처음으로 벗어났다. 혹시나 나 자신이 느슨해질까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읽은 책을 기록하기 위한 용도로, 익명성에 기대어 솔직하게 감상을 적고자, 북스타그램을 시작했다. 지금은 팔로워가 늘어나서 출판사와 작가로부터 책을 선물 받고 있다. 그런데 내 글을 읽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하니, 솔직하고 노골적인 ‘좋다, 싫다’를 표현할 수 없었다. 한 번은 달 사진 밑에 ‘힘들 땐 고개를 들어 달을 봐. 저 달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너를 기다려.’라고 적혀 있는 ‘힐링 에세이’를 선물 받았다. 나는 달 사진과 짧은 글귀에 아무런 감흥도 받지 못했다. 흔해 빠진, 보기에만 예쁜 영혼이 없는 글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선택을 받은 베스트셀러였기 때문에 리뷰로 “싫다”를 밝히기보다, “우리는 지금 청춘들에게 위로와 위안이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라고 썼다. 겁쟁이가 쓴 글은 내가 한심하게 여기는 ‘달 타령’과 다를 게 없었다.


SUSPIRIA (2018)

 <조조 래빗>의 감독, 타이카 와이티티는 용감하다. 히틀러를 전면에 앞세워 희화화시킬 생각을 하다니.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위안부 강제징용을 피해 숨은 조선의 소녀 이야기를 코미디로 풀어낼 수 있는 감독이 몇이나 있을까? 그것도 일본군 장교에게 레이스 달린 수영 모자를 씌워 그를 귀엽고 우스꽝스럽게 그려내면서? <서스페리아>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도 용감하다. <아이 엠 러브>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큰 성공을 거둔 그는 <서스페리아>로 돌아왔다. 여름의 빛나는 사랑을 그리던 감독에게 소녀들이 마녀를 위해 군무를 추고, 결국엔 피를 흘리며 제물이 되는 ‘고어물’을 기대한 사람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부러진 다리뼈가 살갗을 뚫고 나오고, 마녀가 희생양의 배를 가르는... 어쩌면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용감한 모양이다. 거북이 씨도 눈을 감던 장면에서 나는 나치즘을 비판하고자 하는 감독의 아젠다를 보고 감탄했기 때문이다. 그래. 문학과 예술의 영역을 ‘소비하는 나’는 용감하다. 이젠 ‘창작하는 나’도 용감해질 때다. 생각을 꺼내고, 표현하고, 책임지는 삶을 시작해 보자. 나의 아젠다 작가라는 이름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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