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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솔 Oct 19. 2022

[영화리뷰] 아나이스 인 러브

현대인의 사랑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


가이드를 시작하며

숨 가쁘게 뛰어도 모자람을 느낄 만큼, 사랑은 다른 욕망에 앞서는 강력한 추동력이다.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카메라는 사랑에 빠진 아나이스(아나이스 드무스티에)를 바삐 쫓는다. 흥미로운 점은 아나이스가 가진 다른 욕망들과 에밀리(발레리아 브루니 테데스키)를 향한 욕망이 다르다는 것이다. 성격이 급하고 말이 많은 편인 아나이스는 극 초반부터 약속에 늦어 달리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에밀리를 만난 이후로 그녀의 뜀박질은 단 하나의 목표, 에밀리의 마음을 얻기 위한 것으로 바뀐다. 어쩌면 이 영화의 제목 후보 중에 '달리는 아나이스'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나이스 인 러브> 스틸컷_달리는 아나이스_네이버영화



결핍적 인간과 필연적 욕망

우리 모두 그러하듯, 인간은 저마다의 결핍을 지닌다. 인간의 결핍은 가장 본원적으로는 프로이트가 말한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지니는, 정확히 가리킬 수 없는 결핍'을 말한다. 우리는 그 근원적 결핍과 더불어 살아가며 다양한 형태로 욕망을 발산하고, 특정 대상을 갈망한다. 우리는 그 근원적 허무를 나름대로 채우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인간은 늘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존재인 것이다. 숨이 붙어있는 한, 단 한순간도 빠짐없이 무언가를 바란다. 그 갈망의 대상은 사람일 수도, 사물일 수도,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어떤 가치일 수도, 심지어는 어떤 상태일 수도 있다.

아나이스 또한 늘 무언가를 욕망한다. 넓은 집, 작가로의 성공, 그리고 애인. 그러나 아나이스는 남자친구와의 관계에 싫증을 느낀다. 자기중심적인 세상에서 남자친구는 자신을 구속하려는 성가신 존재가 되었다. 자기중심적인 세상에서 다른 모든 인간은 '타자'다. 사랑했던 남자친구도, 그와의 관계에서 생겨난 아이도. 그러던 중 남동생 결혼과 관련된 홈 파티에서 어느 중년 남자를 만나 관계를 맺는다. 다니엘은 아나이스에게 반한 듯하다. 그러나 아나이스의 욕망은 다니엘의 12년지기 연인 에밀리에게로 향한다.


<아나이스 인 러브> 스틸컷_아나이스와 다니엘_네이버영화



아나이스의 욕망이 피어나는 순간

우리는 아나이스가 에밀리를 욕망하는 시발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아나이스는 에밀리를 실제로 보지도 않고, 한두장의 사진과 그녀가 사용했을 물건들을 어루만지며 욕망을 번뜩인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로맨스 드라마의 사랑과 사뭇 다르다. 로맨스드라마의 사랑은 실제적인 맞부딪힘 속에 계기를 두는 반면에, 아나이스의 사랑은 마치 TV를 통해 본 어느 연예인에게 매료되는 과정과 더 닮아있다. 이러한 설정은 현대의 무수한 욕망들을 더 잘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아나이스는 다니엘이 말해준 에밀리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중심으로 자신의 내면에 에밀리의 모습을 그려낸다. 성공한 작가인 에밀리의 인터뷰 영상들이 인터넷에 널려 있으므로, 아나이스는 여러 영상을 보며 에밀리를 욕망한다. 그러다 우연히 도심 한복판에서 에밀리를 만나고, 단 몇마디 말이라도 나눈 것에 기뻐하며 의미를 부여한다.



아나이스의 전진

우리의 저돌적인 주인공은 관계의 전진을 위해 자신이 맡은 학회 보조 업무를 뒤로 하고 에밀리가 참석한다는 학회로 간다. 한적한 지방, 주변이 숲으로 둘러싸인 펜션 단지에서 둘은 재회한다. 아나이스의 눈빛은 열망으로 가득하다. 에밀리도 그걸 느낀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함께 하는 모습이 마냥 아름다워 보이진 않는다. 아나이스의 눈빛은 순수하게 단 하나, 에밀리를 향한 갈망을 말하고 있지만, 에밀리의 눈빛은 복잡미묘하여 읽어내기 어렵다. 아나이스는 그녀와 함께한다는 사실로도 가슴이 벅차오르기에 그녀의 눈빛에서 같은 마음만을 읽어낸다. 그러나 관객은 에밀리의 눈에 담긴 복잡한 심경을 감각할 수 있다.

에밀리의 이 복잡함은 영화 말미에서 드러난다. 에밀리는 아나이스의 욕망을 나름대로 정확히 읽어낸 것 같다. 그래서 마음이 시끄럽다. 에밀리도 아나이스를 갈망하지만, 아나이스가 자신을 원하는 방식은 조금 다른 것을 안다. 아나이스는 에밀리를 에밀리 그 자체로 바라보고 사랑한 것인가?

이쯤에서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당신의 연인을 오롯이 그 자체로 사랑하고 있는가? 아나이스의 사랑이 피어난 방식은 다분히 자의적이었다. 아나이스는 제 안에서 에밀리를 이상적 모습으로 빚어내었다. 아나이스는 제 자기중심적 세계에서, 에밀리를 제 뜻대로 이상화하며, 갈망한다. 에밀리가 아나이스를 밀어내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아나이스 인 러브> 스틸컷_아나이스와 에밀리_네이버영화



달리는 아나이스, 그 끝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결말에 대해서는 함구하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작품 전체에 걸쳐 가장 인상 깊은 한 장면을 꼽으라 하면 이 마지막 장면을 꼽을 것이다. 앞서 말한 '인간의 근원적 결핍'에서 내려와, 우리 모두 크고 작은 개인적 결핍을 가지고 있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이는 없다. 아나이스의 개인적 결핍으로 두드러지게 제시된 것은 '폐소공포증'이었다. 그녀는 닫힌 공간에 있는 것을 견딜 수 없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폐소공포증은 남들과 함께 있으면 괜찮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심해진다. 아나이스에게는 남자친구와 침대를 공유하는 것도, 다니엘과 한 엘레베이터에 타는 것도 힘들다. 아나이스는 그녀가 지닌 폐소공포증조차 자기중심적이다. 한정된 공간을 나눠 쓰는 것이 불편하고 답답하다. 이러한 개인의 결핍을 초월할 수 있다면, 그게 우리가 생각하는 낭만적 사랑일 텐데.  <아나이스 인 러브>의 결말은 꽤나 낭만적이다.


<아나이스 인 러브> 스틸컷_아나이스의 갈망_네이버영화



음악의 과장성

사실 영화관에서 나를 가장 의아하게 만들었던 것은 음악이다. 음악이 다소 과장적으로 쓰였다. 미국의 아주 오래된 애니메이션, 예컨대 <톰앤제리>, <미키마우스>를 연상시키는 과장된 음악. 그래서 음악은 영화 속에 자연스레 녹아있는 것이 아니라, 혼자 둥둥 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이 과장성은 아나이스의 성격, 에밀리를 향한 갈망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아나이스는 에밀리를 부풀려 생각하고 있고, 또 그 사랑에 따른 감정을 눈물과 환희로 분출한다. 에밀리는 고전영화, 만화의 여주인공을 자처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제2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어느 홍보 영상에서 이 작품을 제2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라고 언급한 바 있는데, 이에 시원하게 동의할 수는 없다. 두 여인이 사랑을 키워가는 장소가 고립된 시골이며, 인근에 바다가 있다는 점은 유사하지만, 그 이상의 닮음은 없다. 바다에서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도 표면적으로만 닮았을 뿐이다. 정말이지, 닮은 것은 겉면의 아주 일부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당신이 직접 보고 판단하기를 바란다.



가이드를 마치며

오늘날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과정은 어떠한가. '아나이스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은가. 미디어는 대상의 면면을 고루 보여주지 않으며, 미디어에서 비춰진 특정한 모습들이 그 사람의 인간성을 장악한다. 그리고 우리는 매체에 의하여 과장된 '부분적 인간성'을 사랑한다. 인스타그램에서 비춰지는 그 모습을 사랑한다. 그밖의 삶은 조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을 보면 아나이스의 사랑을 상상적이고 공허한 것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 당신은 누군가를 어떠한 방식으로 갈망하는가? <아나이스 인 러브>는 내게 이러한 물음을 던졌다. 하지만, 영화가 던진 질문과 별개로 영화가 내게 온전한 만족감을 주지는 못했음을 밝힌다. 의미를 발굴하는 작업은 언제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정연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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