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리원 Jun 13. 2024

저녁식사로 스파게티(와 하루키)를 생각했다

이게 다 하루키 때문이야


  

하루키의 소설에는 유독 스파게티를 삶는 장면이 많다.

      


 나는 냄비에 물을 끓여 냉장고 안에 있던 토마토를 살짝 데쳐 껍질을 벗기고, 마늘과 채소를 썰어 토마토소스를 만들고, 거기에 토마토퓌레와 스트라스부르 소시지를 넣고 부글부글 끓였다. 그동안에 양배추와 피망을 가늘게 썰어 샐러드를 만들고, 커피 메이커로 커피를 내리고, 물을 살짝 뿌린 바게트를 포일에 싸서 오븐 토스터에 구웠다. 식사 준비가 끝나자 나는 그녀를 깨우고, 거실 테이블의 빈 잔과 병을 치웠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2. p 348]



 저녁식사로 스파게티를 생각했다. 마늘을 두 알 굵직하게 잘라서 올리오 오일로 볶는다. 그다음에 빨간 고추를 통째 거기에 넣는다. 그것도 마늘과 함께 볶는다. 쓴맛이 나기 전에 마늘과 고추를 꺼낸다. 언제 꺼낼지 시간을 맞추기가 제법 까다롭다. 햄을 잘라서 거기에 넣고, 매콤해질 때까지 볶는다. 거기에다 막 삶은 스파게티를 넣어 살짝 건져내 가지고 잘게 다진 파슬리를 뿌린다. 그러고 나서 산뜻한 모짜레라 치즈와 토마토 샐러드... 나쁘지 않지. [댄스 댄스 댄스 1. p.216]     



 이쯤 되면 읽던 책을 던져두고 주방으로 가 스파게티 삶을 물을 올린다. 하루키의 사실적인 묘사는 도무지 스파게티를 요리하지 않으면 못 배기게끔 만든다. 냉장고를 열어 여분의 재료가 있는지 살핀다. 편으로 썰어둔 마늘과 냉동 새우가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다행히 아이는 내가 만드는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를 무척 좋아한다. 비상약처럼 늘 재료를 상비해 둔다.


     

 그의 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는 여자를 집에 초대하며, 와인과 스파게티 재료를 준비해 두는 남자주인공이 나온다. 그는 그 음식을 먹을 때 틀 음악도 미리 골라 둘 것이다. 스파게티 – 와인 – 음악  하루키는 은근히 전형적이다.

 

 이때부터였을까? 스파게티를 척 해내는 사람에게 어떤 로망이 생겼다. 난 정말이지 엉뚱한데 꽂히는 경향이 강한지도 모르겠다.   추상해 봄직한 이상형의 윤곽이 하루키 소설로 뚜렷해졌다.







 결혼한다면 남편이 다른 건 못해도 스파게티 하나는 잘했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현실 남편은 스파게티는커녕 라면도 못 끓였다. 어머니는 밥을 해서 바쳐야 하는 ‘귀한 아들’을 내게 넘기셨던 것.

    

 결혼생활 17년 차, 나는 생일날 미역국은 고사하고 아플 때 돌봄조차 받지 못한다. 가끔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걸 바라는 내가 잘못된 건가 싶을 정도다. 그래서 나는 아플 수 없다. 아프기 싫다. 늘 그렇듯 이상현실은 다르고, 그 간극은 메울 수 없다.


 아플 때 외면당하는 서러움은 가족의 존재여부를 의심하게 만든다. 대화를 시도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남편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공감능력이 부족한 ‘쌉T’  이과 출신을 선택한 내가 감당할 몫이라는 뻔한 말은, 불행을 훈장처럼 전시하는 브런치스토리에 너무나 어울리는 문장이다.



  

‘무얼 연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지인과의 대화 도중 연재가 끝나면 뭘 쓰나 하는 고민에 ‘남편 흉’을 보면 연재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사실 남편을 흉보는 건 내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다. 어쨌든 남편은 남편이고, 스파게티는 스파게티일 뿐이다.

     

 다행인 건 난 스파게티를 제법 잘 만들고, 내 음식이라면 무조건 엄지를 척 내어주는 딸이 있다. 스파게티 면을 삶고 마늘, 새우를 손질하고 팬을 달구어 소스를 부으며 나는 나를 채운다. 아이에게는 엄마의 요리로 각인될 것이다.


          

  기본적으로 나는 혼자서 스파게티를 삶고 혼자서 스파게티를 먹었다. 누구와 둘이서 먹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혼자서 먹는 것을 훨씬 좋아했다. 그 무렵 나는 스파게티란 혼자서 먹어야 하는 요리인양 생각했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이유는 알 수 없다.       

 혼자서 스파게티를 먹고 있으면 곧잘 금방이라도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비 내리는 날의 오후는 특히 더 그랬다. [스파게티의 해, 하루키 단편]


 그의 단편 <스파게티의 해> 화자 독신 남자 '나'는 살기 위해 스파게티를 삶고, 스파게티를 삶기 위해 산다. 감정의 묘사라곤 조금도 없는 이 문단에서 나는 지독한 고독을 본다. 로 삶이란 남들이 보기엔 어이없는 이유 하나로 이어살아 되는 게 아닐까. 스파게티를 만드는 건 사람 하나 살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람 살리는 일이라면 난 무엇이라도 하고 싶다.



 하루키는 그의 여행에세이 <먼 북소리>에서도 스파게티를 언급한다. 미코노스 섬을 떠나며 드는 감정과 하필 그 찰나에 만들어 먹게 되는 토마토 스파게티.  지중해의 햇살을 받은 토마토는 천상의 맛이라는데, 그는 철수하는 병사처럼 길 잃은 방황의 마음을 내비쳤다.  하루키가 글로 쓰는 스파게티에는 대체로 외로운 맛이 서 가슴 깊은 곳이 급격하게 서늘해지고 만다.




 중년의 나이지만 여전히 스파게티를 삶는 남주가 주절주절 떠드는 하루키 소설에 가슴이 (주책없이) 반짝다. 작가는 이런 생활의 감각을 리얼한 문체로 그려낸다. 나는 사실 그의 빛나는 요리실력보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쏟을 정성이나, 누군가를 생각하고 기다리는 마음을 높이 사는 것이다. 이토록 사소한 것에 마음이 동하는 아줌마, 그녀의 오랜 로망에는 잘못이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하루키가 극찬한 우동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