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행은 아닐까
스물세 살 여름이었다. 혼자 처음으로 시외버스를 타고 바다를 보러 갔다. 첫 도착지는 속초였다. 황금빛 윤슬을 보고 다시 포항행 버스에 올랐다. 영덕 바닷가의 소박한 마을에 내렸다. 혼자 숙박하고 혼자 식당에 들러 밥도 먹었다. 매 순간의 내가 낯설고 새로웠다. 스스로 대견했던 감정은 살아 있다는 생동감으로 바뀌었다.
그때는 삶이란 여행이라고 믿었다.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것, 익숙한 일상을 벗어나 새로움을 탐험하는 것,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도 걸어볼 수 있는 자유. 물론 길을 잘못 들어 어두운 골목에서 겁에 질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조차 ‘경험’이라는 말로 포장되었다. 어떤 위험한 순간도 이야기가 되었고, 실수는 나를 더 단단하고 유연하게 만들었다.
시간이 흘러 여행 같던 삶은 어느 날부터 무게가 되기 시작했다. 해야 할 일, 지켜야 할 관계, 감당해야 할 감정들. 마음을 채우는 문장 하나 없이 지쳐가는 날들이 이어졌다. 출근길 지하철 군중 속의 나는 살아 있는 건지, 사라지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무렵엔 삶이 고행처럼 느껴졌다. 똑같은 하루의 반복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발버둥도 버거웠다. 자주 무의미에 패배했다. 버텨야 했고 견뎌야 했고, 아무도 대신 걸어줄 수 없는 길 위에 홀로 서 있었다. 그 길 위에서는 ‘왜 살아야 하지?’라는 질문조차 사치처럼 느껴지곤 했다.
신기한 건 이십 대 시절 그 기억이 지금 내 안에서 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젊은 날의 무모한 여행도, 지친 일상의 고단한 걸음도 결국은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 왔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철학자 몽테뉴는 “여행은 자아를 발견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삶의 의미는 고통 속에서 찾을 수 있다”라고 했다. 이 말들은 상반되지만, 내 삶 위에 겹치면 이상하리만치 잘 어울린다. 여행이 고행이 되기도 하고, 고행 속에서도 여행의 빛이 스민다.
돌이켜보니 여행은 삶의 형식이고 고행은 삶의 감정이었다. 삶을 살아간다는 건, 형식과 감정이 부딪히고 섞이며 하나의 서사를 만들어 가는 일이었다. 희미한 나를 조금 더 분명하게 알아가는 일이었다.
삶은 여행이기도 하고 고행일 때도 있지만 무엇보다 길이다. 길 위에서는 때로 숨이 차고 때로는 풍경에 감탄한다. 왔던 길을 되돌아 다시 출발점에 서거나, 두 갈래 길에서 다른 길을 선택해야 할 때도 있다. 어쨋든 내가 내디뎌야 발자국이 생긴다. 그 발자국은 언젠가 돌아볼 때 나의 유일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나는 오늘도 걷는다. 목적지를 향하지만 걷는 행위 자체가 의미가 되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