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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끔 쓰는 긴글 Apr 04. 2022

무너지는 세계 속에서
날갯짓하는 이들에게

영화 <벌새> 리뷰

내가 <벌새>를 만난 것은 그저 우연한 계기였다. 한참 논문을 쓰겠다고 영상자료원을 들락거리던 시절이었는데, 이제 와서는 무엇 때문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이유 때문에 괜스레 기분이 울적해지고, 잡다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날이었다. 내가 논문을 다 쓸 수나 있을까. 논문을 다 쓴다고 한들, 그 이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렇다고 지금 하고 싶은 다른 일이 있기나 한가. 뭐 대충 그런 생각들이었던 것 같다. 도저히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아 잠깐 바람을 쐬러 나왔다가 우연히 <벌새>의 포스터를 발견했다. 영상자료원 지하에서 상영 중이라고. 포스터에 적힌 카피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이 세계가 궁금했다.” 내 말이 그 말이었다.


결국 그날은 집에서 왕복 여섯 시간이 걸리는 영상자료원까지 가서 영화만 한 편 보고 온 날이 됐다. 그리고 내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많이 울었던 날이 됐다. 어쩌면 그때가 아닌, 다른 순간에 <벌새>를 만났다면 지금만큼 <벌새>를 좋아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겠다. 혹은 그때 다른 영화를 만났다면 그 영화를 이만큼 좋아하게 되었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사랑은 타이밍이라지 않는가. 그때 내가 만난 건 <벌새>였고, 날 위로해 준 것도 <벌새>였고, 그래서 나는 그 영화와 사랑에 빠지게 됐다는 얘기다.



<벌새>의 도입부는 대담하다. 노란 옷을 입은 소녀가 초인종을 누른다. 또다시 누른다. 그리고 이내 문고리를 신경질적으로 잡아당긴다. 엄마를 애타게 부른다. 목소리에는 점점 신경질이, 울음이 섞인다. 그는 왜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그렇게 애타게 울부짖는가. 문은 왜 열리지 않는가. 사실은 층수를 착각했을 뿐이었다. 은희가 애타게 엄마를 찾던 문은 902호, 바로 다음 장면에서 은희는 이내 자신이 잘못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바로 위층인 1002호로 올라간다. 이번에는 초인종 한 번 만에 문이 열리고, 엄마가 등장한다. 그럼에도 은희의 표정은 풀리지 않는다. 해소되지 않은 이 감정은 이후 내내 영화를 지배한다.


사실 이질적인 장면이다. 보통은 열려야 할 문이 열리지 않으면 잘못된 문을 찾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지 않을까. 은희는 왜 다른 문일 거란 생각을 해내는 대신 열리지 않는 문을 계속 두드렸을까. 영화의 딱 절반을 지났을 즈음에 도입부와 비슷한 장면이 다시 한번 등장한다. 병원에 다녀온 은희는 집 앞에서 멍하니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엄마를 발견한다. 몇 번이고 엄마를 불러 보지만, 엄마는 은희를 끝까지 돌아보지 않는다. 엄마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조차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도입부에서 은희가 열리지 않는 문에 대고 그토록 엄마를 부르짖었던 것은, 문을 두드렸을 때 누군가 열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일 테다. 문을 열어주어야 할 엄마가, 어딘지 모를 곳으로 훌쩍 사라져 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 그래서 은희는 버림받았다는 듯이 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짧은 장면이지만, <벌새>의 도입부는 은희가 바라보는 세계를 단도직입적으로 보여준다. 은희에게 당연한 일은 없다. 내 집의 문이 두드리면 열려야 한다는 것조차 당연한 일이 아니다. 그의 세계는 언제든 무너져버릴 수 있는 무언가다.



영화는 계속해서 무너지는 은희의 세계를 보여준다. 첫 키스를 나눈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단짝친구에게 배신당하면서 윤희는 속절없이 무너진다. 수없이 무너지는 세계 속에서 무엇 하나라도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에, 은희는 귀 뒤에서 떼어낸 혹조차 그리워한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노랫말처럼, 사랑은 유리 같은 것인데. 친구보다, 부모보다 자신을 좋아한다던 후배는 다음 학기가 되자 냉정한 얼굴로 돌아선다. 언니, 그건 지난 학기잖아요. 지난 학기의 세계는 이번 학기가 되면 무너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무너질 리 없다 생각했던 관계가 무너지고, 깨질 리 없다 생각했던 사랑이 깨진다. 이런 일들에 비하면 김일성이 죽고 성수대교가 무너진 일도 사실은 별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떤 시인은 고궁을 나서며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하고 한탄했지만, 사람이란 그럴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는지도 모른다. 결국은, 가끔 자기밖에 모르는 게 사람이다.


김일성이 죽었을 때 은희에게는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다. TV 속에서 울부짖는 북한 사람들의 모습과 은희의 무표정한 모습은 대조적으로 그려진다. 은희가 무너지는 세계와 자신을 연결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성수대교 위에 언니가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름 없는 서른두 명의 사망자 중에 영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지의 죽음을 알고서 은희는 무너진 성수대교를 찾는다. 새벽 어스름 속 무너진 성수대교 앞에서 은희는 자신 주변의 작은 세계가 역사적 사건과 겹쳐져 있음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세계는 원래 이런 것이구나. 당연한 것은 정말 어디에도 없고, 모든 것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구나.



은희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김일성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오자, 같은 병실에 입원한 환자들은 말한다. “김일성은 안 죽을 줄 알았지.” 성수대교가 무너진 후 은희가 찾아간 영지의 집에서 영지의 어머니는 말한다. “어떻게 다리가 무너지니, 어떻게 그렇게 큰 다리가...” 영원히 죽지 않을 것 같던 김일성이 죽고, 무너진다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서울 한복판의 다리가 무너진, 1994년은 그런 해였다.


물론 그런 일이 1994년에만 일어났던 것은 아니다. 그 바로 이듬해엔 강남 한복판에서 백화점이 무너졌다. 또 그로부터 3년 뒤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수많은 재벌그룹들이 부도가 났다. 나는 아직도 군대에서 당직을 선 후 보았던 2014년 4월 16일 아침 뉴스를 잊지 못한다. 전원 구조라던 보도가 338명 구조로, 180명 구조로, 174명 구조로 줄어들던 장면이 선연하다. 우리가 알고 있던, 아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세계는 정말 아무 전조도 없이, 갑작스럽게, 그리고 극적으로 무너지곤 한다.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무너지는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영지의 마지막 편지처럼,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도저히 모를 일이다. 그래도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얻는다. 영지는 은희에게 말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손가락을 움직여보라고. 신기하게도 손가락은 움직여진다고. 그래서 은희는 손가락을 움직인다. 그리고 엄마를 애타게 부르는 대신 엄마의 등 뒤에 차분히 앉아 감자전을 먹고 서로를 바라본다. 여름에 불안함만 가득했던 은희의 표정은, 많은 일들을 겪은 후 가을에 와서 오히려 편안함을 찾는다. 세계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오히려 지금 곁에 있는 것들,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더 사랑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벌새>는 1994년, 한국의 중학교 2학년 여자아이의 날갯짓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은희의 발걸음을 쫓다 보면, 평범한듯하면서도 균열이 가득한 한 가족의, 그리고 은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날갯짓이 계속 눈에 밟힌다. 말도 없이 학원을 떠나야 했던 영지의, 너무 무서워서 친구를 배신할 수밖에 없었던 지숙의, 엄마 때문에 은희와 헤어져야 했던 지완의, 남자친구와 창문을 넘어야 했던 수희의, 삶에 지쳐 떠나가고 싶어도 자리를 지켜야 했던 엄마의 날갯짓들. 처음에는 염치없어만 보였던 아빠와 대훈의 눈물도 영화를 여러 번 보다 보면 그저 이 세계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랐던 이들의 어설픈 날갯짓으로 다가온다. 거대하고 특수한 사건을 앞에 두고도, 사건 자체보다 사건을 둘러싼 감정에 주목하면서, <벌새>는 그야말로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를 해낸다. 그래서 누구나 문득, 어느 순간 <벌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는 것을 썩 즐기지는 않지만, <벌새>만은 예외다. 시쳇말로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라 하는, 아마 누구나 겪어 보았을 그런 감정이 나를 지배하는 순간마다 <벌새>를 본다. <벌새>에서 일어난 수많은 균열들과 상처들은 대부분 결국 모두 얼기설기나마 붙여진다. 살기 위해 매 초 수십 번씩 날개를 움직이고, 매 분 수백 번씩 심장을 박동하는 벌새처럼, 지금도 세상 어딘가에서 조금씩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을 은희들에게 <벌새>는 작은 위로를 남긴다. 그저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괜찮아지는 순간이 올 거라고. 물론 그 순간마저도 영원할 리야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 글을 남기기 시작한다면, 꼭 <벌새>에 대한 글로 시작하고 싶었다. 항상 나에게 용기를 주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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