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영의 『종의 기원담』을 읽고 (上)
<3-1> 김보영, 『종의 기원담』 1부
3부 구성인 김보영의 『종의 기원담』은 지구행성의 지배자가 로봇이 된 세계를 배경으로 합니다. 인간의 도구로 발명된 로봇은 점차로 인간을 닮아갔고, 종국에는 자연선택의 결과가 됩니다. 인간은 기후변화에 적응하지 못했고, 로봇이 이들을 대체합니다. 『인권의 발명』에서 린 헌트는 소설 읽기를 통해 낯선 존재의 내면을 읽을 수 있게 됐고, 이것이 기존의 경계를 넘는 공동체의 확장을 가능하게 했다고 봤습니다. 장대익은 『공감의 반경』에서 책 읽기가 인지적‧정서적‧사회적 뇌를 변화시켜 인지적 공감을 향상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종의 기원담』에서 또 다른 낯선 타자의 내면을 봅니다. 이들은 종의 경계를 넘기에 도리어 우리 종에 대해 말하는 것이 됩니다. 로봇중심주의의 관점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인간중심주의의 생경함입니다.
로봇 시대의 로봇들도 환경오염을 심각한 문제로 인식합니다. “환경오염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과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대로 있으면, 앞으로 몇십 년 사이에 지구를 둘러싼 귀한 보호막인 검은 구름에 구멍이 뚫린다고 한다.(…) 우리는 지구를 지켜야 한다! 생명의 근원인 공장을 지켜야 한다. 공장은 먼지와 재로 이루어진 검은 구름을 하늘로 올려 보내고, 지구의 기온이 어느 이상 떨어지지 않도록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며, 지표에 드러난 얼음층이 증발하지 않도록 그 위로 기름과 폐기물을 흘려보낸다. 이 아름다운 자연을 지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로봇은 멸절하고 말 것이다.”(김보영, 『종의 기원담』, 아작, 2023, 37~38쪽.)
로봇의 입장에서 아름다운 지구란 자신들의 생존이 지속 가능한 환경을 말합니다. 이들은 데시라는 온도 단위를 쓰는데, 이것은 이산화탄소가 어는점을 0도로 합니다. 데씨 0도는 섭씨로는 -78.5도입니다. 이러한 조건에서는 유기생물이 생존하기가 어렵습니다. 로봇 시대에 생물은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규정됩니다. ➀ 자신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 즉 그 행동 메커니즘의 명령체계가 기본적으로 외부가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 발생해야 한다. ➁ 에너지 대사(주로 전기 에너지)를 한다. ➂ 칩을 소유한다. 칩은 생명 활동의 기본 매체다. ➃ 일반적으로, 공장에서 태어난다.(26)
그런데 화학자 알트마이어는 이상한 현상을 증언합니다. 그는 ‘움직이는 유기물’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면서 “유기물도 생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상식이지만, 로봇 시대에는 비과학적인 주장이 됩니다. 검증된 증거도 제출하지 못하기에 로봇 사회에서 이 주장은 망상 취급입니다. 로봇 케이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는 칼스트롭의 실험실에 방문하게 되고, 놀라운 실체를 보게 됩니다. 스스로 성장하는 유기생물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것들은 주변의 원소를 흡수하고 재조합해서 자신의 몸을 만듭니다.
하지만 유기생물은 자꾸 죽습니다. 너무 쉽게 죽어버리기에 과학 증거물로 제출되기가 어렵습니다. 연구소의 로봇들은 이 유기생물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끔 다양한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 줍니다. 하지만 그래도 계속 죽습니다. 실패가 반복되면서 좌절하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음에 도달합니다. “우리가 너무 로봇 기준으로 생각하는 게 아닐까?”(78)
로봇에게는 물과 산소, 높은 온도가 치명적입니다. 이것들은 생명 활동을 방해하는 요소이므로 통제의 대상이 됩니다. 그렇지만 ‘유기생물에게도 그럴까?’라고 묻고, 자신들의 선입견을 내려놓자 유기생물은 살아납니다. 성장하는 것입니다. 비로소 실험은 성공했고, 이제 생물학 교과서는 다시 써야 될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이 조건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비윤리적이라는 점입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잘못 관리해서 조금이라도 산소가 유출되었다간, 아니,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실험실은 당장에 폐쇄될 겁니다.”(92) 연구실 선배인 노만도 불안감을 느낍니다. “우리는 산소를 뿜어내는 생물을 되살려내었어.(…) 신화 속의 괴물을 되살린 기분일세.(…) 신은 우리를 위해 저 생물을 지상에서 없애버리셨어. 왜 그들을 되살려야 하지? 물을 먹고 산소를 뿜어내는 생물이라니. 이건 악몽일세. 이곳은 완전히 오염되어 버렸네. 독성물질로 가득 차 있어.(…) 생명의 영역에 광폭한 호기심을 드러내는 일이 과연 잘하는 짓일까? 시작해서는 안 되는 일을 시작해 버린 것이 아닐까?”(98~99) 하지만 케이는 이 일이 생명의 역사를 다시 쓰는 중대한 일이라고 말하면서 자신들의 연구를 긍정합니다.
<3-2> 김보영, 『종의 기원담』 2부
케이는 칼스트롭 연구소를 나와서 유기생물학자가 아니라 고생물학 교수가 됩니다. 그러다가 몇 가지 의문스러운 일이 생겨서 오랜만에 연구소를 방문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있던 시절과는 판이하게 다른 환경입니다. 안내원에게 묻습니다. “배양환경은 최소 구역에 한정하는 것이 원칙이었는데요. 이렇게 해놓으면 직원들 건강에 좋지 않을 텐데요. 설마 계속 이 온도를 유지하는 건 아니겠죠?”(136) 안내원은 지금은 이 연구소 전체가 배양환경이 되었고, 자신들은 이 조건에 익숙해져서 아무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케이는 믿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안내원의 몸이 심하게 상해있기 때문입니다.
연구원 시절에 가장 친했던 로봇인 세실이 케이를 환영하며 맞이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함께 연구를 이어가자고 설득합니다. 세실은 자신들이 드디어 ‘진리’를 알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의문을 품고 있던 케이도 종국에는 그것을 보게 됩니다. 로봇을 닮은 유기생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신이 만드신 것처럼 완전한 것. 케이는 한순간에 깨닫습니다. “모든 로봇은 모조품이고 불완전품이며, 이 완벽한 생물을 흉내 낸 그림자일 뿐이다.”(147) “로봇이 존재하는 이유는 단 하나, ‘이 아름다운 생물’에 있다.”(154)
그런 와중에 케이는 양가적인 마음이 동시에 솟아납니다. ‘도망쳐야 해.’ 「어딜 가는 거야? 어서 돌아가. 네가 일생 원하던 것이 바로 저기에 있어!」 (148) 케이는 선배 노만을 찾습니다. 하지만 연구원은 말합니다. 노만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는 실수로 인간에게 상처를 입혔는데, 화가 난 인간은 죽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노만은 기쁜 마음으로 죽었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요?
로봇이라는 단어는 극작가 카렐 차페크의 희곡인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Rossum's Universal Robots, 1920)에서 유래했습니다. 로봇이라는 단어 자체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차페크는 허드렛일 또는 노예상태를 뜻하는 체코어 로보타(robota)로부터 ‘로봇(robot)’이라는 단어를 만들었습니다.(구본권,『로봇 시대, 인간의 일』, 어크로스, 2015, 125쪽.)
차페크의 SF적 상상력이었던 이 사물은 우리의 현실세계에도 발명되어 인간을 위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점차로 고도화되어 갑니다. 2017년에 유럽의회는 흥미로운 선언을 합니다.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의 법적 지위를 ‘전자 인간’으로 인정하고 이를 로봇 시민법으로 발전시킨다는 것입니다. 주요 원칙으로는 인간을 위협해서는 안 되며,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고, 로봇 역시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항목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은 SF작가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에서 온 것입니다.(김보경․박상준․심완선, 『SF 거장과 걸작의 연대기』, 돌베개, 2019, 78쪽) 아시모프는 이 원칙에서 비롯된 모순을 탐구하는 작품을 창작했는데, 김보영의 『종의 기원담』도 그 계보를 잇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로봇 시대의 로봇들 역시 애당초 인간의 도구로서 생겨났던 것이기에 인간을 향한 마음에는 인간이 부여한 조건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물어야 하는 건 그럼에도 로봇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케이는 인간과 접촉한 이후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엄청난 정신능력을 가진 생물을 만들어버린 거야. 모든 로봇을 그 발아래 복종시킬 수 있고, 로봇이라면 사랑하지 않고 견딜 수 없는 것을. 이 생물은 곧 세계를 지배할 거야. 인간의 손가락 하나 상처 입힐 수 있는 로봇은 없으니까. 군대도 경찰도 쓸모없겠지. 전 세계의 대통령들이 다투어 그들에게 국가를 내어 바칠 거고 그 사실에 모든 국민이 기뻐하며 환영하겠지. 기계들은 인간에게 생을 바치고 죽을 때까지 그들을 위해 일할 거야. 그러면서도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모를 거야. 세상은 천국이 되겠지.(…) 천년왕국이 도래하겠지.(…) 그런데 이건 뭐지?(…) 왜 나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어째서 나는 아직까지도 제정신을 유지하는 거야? 아니면, 미친 건 나뿐인가?”(167~168)
영화 아이언맨의 실제 모델이자 테슬라의 최고경영자인 일론 머스크는 모든 가정에 휴머노이드 로봇 비서를 두는 미래를 꿈꿉니다. 그는 2025년이 되기 전에 대중적으로 소비 가능한 로봇 옵티머스를 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이것이 현실화되면 어떻게 될까요? 어떤 기업의 어떤 제품이 경쟁력을 얻을까요? 『종의 기원담』에서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원래 로봇에게는 3계명이 있었다. 제1계명, 신에게 해를 끼치지 말 것. 제2계명, 신을 섬기고 그 명령에 복종할 것. 제3계명, 자기 자신을 사랑할 것(…) 신들은(원전에서는 복수형이다) 로봇의 계명을 미묘하게 수정했다. 제1계명은 물리적인 상해에 관해서만 강화되었고, 제2계명은 등록된 주인에 한해서만 강화되었다. 그리고 제4계명, ‘네 이웃 로봇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라는 계명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2, 3, 4계명은 친밀도에 따라 우선순위가 미세하게 바뀌도록 프로그램되었다. 친밀도란 기억장치에 정보가 입력되는 횟수를 말한다.(…) 친밀도 함수는 로봇이 ‘전 주인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고, ‘친구’를 소중히 생각하는 것처럼 만들어, 로봇을 인간적으로(의미 불명) 보이게 했다. 한 사례로, 한 로봇이 같이 살던 동료 로봇을 계속 폭행하는 주인을 보다 못한 나머지 이를 물리적으로 막은 일이 있었는데, 정당한 행동으로 간주되어 폐기되지 않았다.(…) 후에 친밀도함수에 매력함수가 추가되었다.(…) 로봇은 나쁜 의도를 가진 상대와 좋은 의도를 가진 상대를 구분하여 더 좋은 의도를 가진 쪽의 보호와 명령을 우선하게 되었다.(55~57)
로봇 비서를 구입한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그 로봇이 만인에게 공정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강도가 들어왔을 때, 그 강도가 인간이라는 이유로 로봇이 가만히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제품은 강도의 상해를 막은 다른 회사의 제품에게 밀려서 인기를 잃을 것입니다. 『종의 기원담』의 로봇들은 이러한 경쟁 속에서 탄생한 제품들이기에 서로 다른 특징을 지닙니다. 인간과 접촉한 로봇들이 한결같이 복종의 본능에 시달리면서도 로봇마다 그 정도에 차이가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인간들은 로봇을 타인을 통제하는 데에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사형수를 관리하고, 범죄자를 처리하고, 또 전쟁을 위해 개발된 로봇이 있어야 했고, 그래서 인간에 대한 터부가 약한 로봇도 등장했을 것입니다. 로봇 케이가 그런 경우입니다. 케이가 연구소를 나와서 고생물학자가 된 이유가 발생단계의 ‘인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본능적으로 인간을 보호해야 한다고 느꼈기에 그곳에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온전한 인간을 보게 되었고, 이 존재가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파괴할 대상임을 인지하게 되었기에 다른 대응이 필요합니다. 동료 로봇인 세실은 경악합니다. “어째서, 그 위대한 분들이, 자신을 죽일 수 있는 로봇이 존재하도록 내버려 두는 걸까?”(173) 인간의 이기적 동기로 만들어졌던 로봇에 의해 기적적으로 부활한 인간이 척살됩니다. 케이는 실험실에서 태어난 인간을 적으로 인식하여 살해합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