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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우주 Mar 15. 2024

37. 『드래곤볼』과 함께 하는 인생

토리야마 아키라 추모글

37. 드래곤볼과 함께 하는 인생

-토리야마 아키라 추모글          



<1> 아들이여, 소년이 돼라!     


 쿨타임이 돌면, 정주행을 재개하는 몇몇 작품이 있다. 그중에서도 내 인생의 걸작은 단연 『드래곤볼』이다. 몇 년 만에 쿨타임이 찼고, 다시 주행했다. 이번에는 풀컬러판이다.      


 풀컬러판은 「소년 편」, 「피콜로 대마왕 편」, 「사이언 편」, 「프리저편」, 「인조인간 셀편」, 「마인부우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실 성인이 되고 나서 이 만화를 재독 할 때는 대충 보는 시리즈가 있다. 바로 「소년 편」이다. 이미 끝을 알고 보는 것이라 스케일도 소박하고 소소한 에피소드 묶음처럼 여겨지는 「소년 편」은 어른이 된 내가 보기에는 시시했다. 그런데 이번에 정주행을 다시 하니, 그때 재미가 없었던 이유는 내가 충분히 어른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언젠가 한 친구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해보니, 우리가 지금까지 애였다는 걸 알겠다.” 애 아빠가 된 친구의 어른스러운 말이었다. 친구는 육아의 풍랑에 쓸려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고, 가끔 생존 신호를 보내온다. 그런 세월이 그렇게 흘렀다. 그러다 보니, 세상에! 나도 아빠가 됐다. 이제 나도 어엿한 어른이 된 것이다. 그래서 『드래곤볼』을 본다. 잔소리하는 엄마는 이제 없다. 대신 아내가 애 보듯 보고 있지만, “이제 나도 어른이라고요!”     


 어른이 돼서 「소년 편」을 보니, 애가 보인다. 우리 애가 보인다. 28개월이 된 아들놈이 드래곤볼을 모은다. 그럴 리가 없고, 그리 닮지도 않았지만, 그런 심정이 들었다. 손오공의 모험이, 아들의 모험 같다. 투명하고 맑고 무섭다. 그리고 무엇보다 귀엽다. 내 어릴 적 상상친구가 관짝을 뜯고 나와서, “안녕, 아빠는 처음이지?” 한다.           



<2> 매주 우리는 ‘드래곤볼’을 보았다.     


 뻥이지만, 내 유년기의 8할은 드래곤볼이었다. 그런 믿음으로 살았다. 1990년대에 유년기를 보낸 나는 드래곤볼과 함께 컸다. 엄마가 보면 큰 병폐고, 한 아이로서는 축복이다. 『드래곤볼』은 만화 잡지 《아이큐 점프》에서 연재했는데, 매주 나왔다. 당시 국민학생(지금의 초등학생)이었던 우리는 혼자 이 잡지를 모을 순 없었다. 우리의 용돈은 항상 곤궁했고, 잡지는 값이 비쌌다. 그럴 만큼 값진 잡지였지만, 그 값진 내용은 몇 장 되지도 않았다. 우리에게 《아이큐 점프》의 999할은 「드래곤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손오공이 지구 구석구석을 뒤져 드래곤볼을 모으듯이, 각자의 용돈을 구석구석 모아서 겨우 한 권을 영접했고, 간증하듯 돌려보았다. 그렇게 우리는 인생을 배웠다. “이게 바로 낙이구나!”     


 내겐 그런 낙이 또 있었는데, 매주 일요일 낮 시간이 그랬다. 우리 집은 다른 친구들과는 좀 다른 가족구성이었다. 1990년대의 대한민국 도시는 바야흐로 핵가족의 시대였다. 하지만 우리 집은 대가족은 아니지만, 핵가족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집이었다. 일단 큰고모가 우리 가족과 함께 살다가 시집을 갔고, 막내삼촌은 내가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 함께 방을 쓰며 지냈다. 우리 집에 있거나 혹은 근방에 있었던 삼촌은, 병원 삼촌, 군대 삼촌, 방앗간 삼촌이 있었고, 방앗간 삼촌은 이제 작은 고모부가 됐다. 우리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은 삼촌이 많은 우리 집을 신기해했다. 삼촌들은 한결같이 부지런히 일을 했기에,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 더 드래곤볼을 사랑할 수 있었다.     


 우리 집은 독실한 기독교 집이었고, 일요일은 일요일이 아니라 주일이었다. 그래서 교회를 가야 했다. 아버지는 총각시절부터 다니던 교회가 있었는데, 거기는 멀었다. 총각 시절에는 거기가 가까웠지만, 결혼을 하고는 생계를 위해 다른 동네로 이사를 왔기 때문에 멀어졌다. 하지만 의리의 아버지는 계속 그 교회에 출석하며 헌신을 이어갔다. 그 시절의 어머니는 놀랍게도 아버지와 세트메뉴였다. 하여 함께 먼 교회로 가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우리는 나와 여동생이다. 내게는 세 살 터울의 착한 동생이 있다.    

  

 어린애들을 데리고 먼 교회로 가는 것은 곤욕이다. 교회 일정도 이른 아침 시작하여 늦은 오후까지 계속되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엄마의 젖을 뗀 후로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교회로 갔다. 거긴 막내 삼촌도 다닌 교회로, 그러니까 우리는 같이 교회를 갔다가 같이 집에 왔다. 집에 오면 점심시간이었는데, 이제 우리의 ‘낙’이 시작된다. 당시 나는 이 ‘낙’이 우리의 낙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건 ‘우리’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에 가까웠을 것이다. 동생이 착해서 다행이다.     


 교회를 다녀오면, 삼촌은 돈을 주며 심부름을 시킨다. 점심 장을 보고 오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주 같은 점심 메뉴를 먹었다. 드래곤볼을 모아 용신에게 소원을 빌어서 만든 것 같은 완벽한 식품을 우리는 매주 먹었다. 바로 라면이었다. 엄마는 절대 라면을 끓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소원은 주님 덕분에 매주 성취됐다. 삼촌에게 가장 중요한 심부름은 라면과 함께 사 오라는 복권이었을 것이다. 그건 동전을 긁어서 당첨을 확인할 수 있는 복권이었는데, 그 시절에는 그것을 구경하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복권은 대개 꽝이었고, 또 ‘꽝이겠지’ 하며 자포자기할 때 당첨됐다. 물론 그래봤자, ‘한 번 더’와 다를 바 없는 소액이었다만. 여하튼 그 ‘꽝’은 영원한 것이었지만, 당시 삼촌의 꿈은 소박했기에 아름다웠다. 그리고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들렸던 비디오 대여점이 메인이었다. 삼촌은 비디오 한 편을 빌릴 수 있는 돈도 매번 챙겨줬는데, 나의 선택은 항상 <드래곤볼>이었다. 날이 차면 어김없이 보름달이 뜨고, 그 달을 본 사이어인들이 괴물원숭이가 되는 것과 같이 그것은 우주의 법칙이었다. 간혹 동생이 딴 소리를 했던 것 같은데, 그건 우주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이었기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니까, 세상에 좋은 오빠는 없다. 그렇게 우리는 매주 그놈의 드래곤볼을 보고 또 보고 또 보고 또? 했던 것이다. 게다가 우리 동네 비디오 대여점에는 <드래곤볼 Z 편>이 없었기에, 소년 오공을 보고 또 보고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오리지널 Z 편은 없었지만, 극장판은 몇 개 있어서 그것도 열심히 돌려보곤 했다. 동생은 Z보다 소년 편을 더 좋아한 터라 동생을 위해 소년 편을 더 자주 보았다. 나는 그럴 때마다 생색을 냈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 오빠의 양보는 ‘양보’라고 해서는 안 되고 ‘사기’라고 해야 한다. 동생이 착해서 너무 다행이었다.         


      

<3> 드래곤볼, 포에버!  

   

 소년 편을 좋아했던 동생은 나보다 어른스러웠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친구들은 동생을 누나라고 불렀다. 간혹 형님이라고 부른 놈도 있다. 동생은 그렇게 불리는 걸 반기지 않았지만, 그래서 그랬던 건지는 몰라도, 실제로 나보다 먼저 어른이 됐다. 내가 여전히 애 같다는 소리를 들을 때, 동생은 이미 엄마가 됐다. 어른이 된 후에 애와 말을 섞는 것은 쉽지 않다. 애는 애 같은 세계가 있고, 어른이 볼 때 그 세계는 유치하고 시시하다. 그래서 이들 대화에는 언제나 어른의 인내와 관용이 필요하다. 그래서 동생과 내가 말을 섞는 것은 쉽지 않았다. 육아는 간접 경험과 직접 경험의 간극이 가장 먼 세계였고, 착한 동생도 다 들어줄 필요는 없다. 그래서 생각한다. ‘나도 아빠가 되어 다행이다.’ 그런 생각인데, 동생과 아내가 만나서 말했다. “애가 애를 키우고 있답니다.” 내 얘기는 아니라고 믿는다.     


 며칠 전 충격적인 비보를 들었다. 『드래곤볼』 작가 토리야마 아키라가 급성 경막하 혈종으로 이승을 떠나 저승의 염라대왕에게 갔다는 것이다. 『드래곤볼 슈퍼』가 정말이지, 내가 어릴 적 다니던 동네 슈퍼보다 낫을 게 없어서 사탄 들릴 것 같았는데, 한순간에 혼이 나갔다. 급작스러웠고, 너무 이른 이별이었다. 점쟁이 바바 할머니가 있으니, 하루는 이승에 놀러 올 수도 있겠지만, 이제 영영 “안녕”을 고한 것이다. 그래서 뭔가를 써야만 했다. 그래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나는 도무지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는데, 돌아보니 있었다. 그러니까,     


 드래곤볼이 남았다.      


 그런 인생이다. 오공이 되고 싶었던 애는 커서 오공 같은 애를 낳았다. 오공 같은 애는 자랄 것이고, 다시 드래곤볼을 모을 게다. 그러니까, 드래곤볼은 불멸의 밈(meme, 문화 유전자)이 되어, 다음 세대를 돕는다. 그럴 인생일까? 이제는 아들의 모험이 기다리고 있다. 끝이 났기에, 다시 시작이다.    

 

 “앞으로도 여러 가지 사건들은 분명 일어날 테지만,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극복해 내겠죠. 걱정은 필요 없어요! 드래곤볼이 있으니까!”(『드래곤볼』 오리지널 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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