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나잇 인 파리를 상상하며(19. 4. 10~)
파리의 이튿날은 오르세 미술관에서 보내기로 했다. 바티칸 투어 덕분에 뮤지엄에 대한 관심이 커지기도 했고 무엇보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고 싶었던 곳은 루브르 박물관이었으나 화요일은 루브르와 오랑주리 모두 휴관일이었다.
흐린 하늘을 등에 지고 오르세 미술관에 도착했다. 다른 뮤지엄이 휴관이었던 데다 한창 유럽권 학생들 단체관람 시즌이었던 터라 입장 줄이 어마어마했다. 대기라인 앞에서 버스킹 중이던 기타리스트의 곡이 10곡을 넘어갈 즈음에야 내 앞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뮤지엄 투어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기에 홀로 관람하는 것에 대해 조금 걱정이 됐다. 다행히 한국어 지원이 가능한 오디오 가이드가 있었다. 미술품 하단에 붙어있는 넘버를 오디오에 입력하면 녹음되어 있던 친절한 해설이 관람을 도왔다. 시간이 많이 걸리기는 했지만 안내책자와 오디오를 찾으며 홀로 미술품을 감상하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을 줬다.
이름이 익숙한 인상파 작가들의 작품이 포진해있는 상층부터 관람을 시작했다. 미술시간에 좋아했던 모네, 세잔, 르누아르의 그림들을 볼 수 있어서 반가웠다. 평면으로 내려봤던 그림을 앞에 두고 보니 그 속에 들어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는 기분에 작품마다 한참을 서서 봤던 것 같다. 상층을 떠나기 전 포토스폿을 구경하던 중 어떤 관람객이 사진을 부탁했다. 너무 미안해하며 여러 장의 사진을 요청했는데 내가 잘 찍지 못해서 오히려 미안했다(내 사진을 너무 잘 찍어줘서 더 미안했다ㅠ)
중층으로 내려가 기대했던 고흐 전시관을 찾았다. 유명한 작가인 만큼 사람이 너무 많아 제대로 감상하기가 어려웠고 별이 빛나는 밤도 다른 전시회에 대여중이라 볼 수 없어 아쉬워하며 내려가던 중에 거대한 조각품 하나가 걸음을 세웠다. 멀리서 봤을 땐 거친 나무줄기처럼 보였던 조각 하나하나의 손짓과 표정이 너무 처절해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괴로움이 일었다. 알고 보니 로댕의 지옥의 문이었다. 그냥 막 고개만 돌려도 엄청난 작품들이 눈앞에 있어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좋을 것 같았는데, 배가 너무 고파서 힘들었다. 결국 지상은 휘리릭 수준으로 둘러보고 나왔다. 이게 또 파리를 다시 찾아야 할 이유가 되어버렸다.
오르세 안에도 식당과 간단한 식음료를 파는 카페가 있었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이용하기가 어려웠다. 오후 두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라 미술관 근처의 식당은 대부분 한산했다. 골목을 한 바퀴 돌다가 아직 식사 중인 테이블이 있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파스타와 양파수프를 주문했다. 유일하게 먹은 프랑스 음식이었는데, 생각보다 양이 너무 많았다. 도저히 다 먹을 자신이 없어 포크를 깨작거리는데, 맞은편에 홀로 식사 중이던 분과 눈이 마주쳤다. 자신의 피자를 가리키며 웃어 보이는 그녀에게 나 또한 어색하게 투 머치, 하고 웃어 보였다. 계산을 하며 많이 남겨 미안하다고 전하는데 콧수염이 멋진 아저씨가 쿨하게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체력을 충전하기 위해 숙소에서 쉬었다가 해가 저물 무렵 야경을 감상하기 위해 다시 나왔다. 전날 유람선에서 본 야경만으로는 아쉬워 급하게 신청한 야경투어로 파리 시내를 둘러봤다. 파리 명소에 대한 설명과 그에 어울리는 음악을 들으며 걷는 투어였는데, 인원이 적어 여유 있게 움직일 수 있었다. 노르트담 성당 앞에서 투어 일행들과 사진을 찍었는데, 여행이 끝나고 나서야 투어 다음날 노트르담 성당에서 화재가 일어났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앞에서 투어 일행들과 성당 내부를 관람할지 말지 고민하던 때가 마치 오래전 일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소식이었다.
한 시간 정도의 투어가 끝나자 완전히 어둠에 물든 하늘 아래 파리 시내가 조명을 받아 빛났다. 센 강 옆을 걸으며 유람선을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그들에게 반가운 환호성을 지르는 이들을 보며 어제의 낭만을 다시 떠올렸다. 자꾸만 현실을 잊게 만드는 낭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