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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r Aug 17. 2022

유럽 처음, 인터라켄

낯선 이들과의 반가운 만남(19. 4. 12~ )



여행이 시작보다 끝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음날 일찍 바젤행 기차를 타는 것에 부담을 느끼면서도 파리에서 같은 방을 쓰던 동생들과 와인잔을 기울였다. 낯선 이들과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그 시간에 맥주가 아닌 와인이 곁들여지는 것도 새로웠다. 여행을 다니며 많은 이들을 만났다. 우연히 지나가다 인사 몇 마디를 나눈 이도 있고 이처럼 밤늦게 각자의 지난 여행길에 대해, 살아온 날에 대해 나누기도 했다. 여행지에서 만난 모두가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로 남았고 나 역시 그렇게 남기를 떠나는 기차 안에서 생각했다.


바젤에 도착하자 신선하면서 서늘한 공기가 콧속 깊숙이 들어왔다. 시종일관 건물만 담던 내 시야에 눈을 뒤집어쓰고 바람에 흔들리는 초록의 물결이 들어왔다. 콧속만큼이나 머리가 시원해지는 풍경 앞에서 나도, 앞자리에 앉은 이도 창 밖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다국어를 사용하는 스위스 승무원들은 파리를 떠나는 내게 봉쥬르 또는 메르시로 인사를 건네 왔다. 그 역시 낯설고 신기했다.


숙소 체크인 시간을 기다리기 위해 캐리어를 인터라켄 역사에 맡기고 무작정 베른으로 향했다. 구시가지 전체가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있다는 홍보성 글에 빨려 들었던 것도 있지만, 일단 어디든 가야 했다. 스위스에서 일정은 파리보다 더 단출했다. 날씨가 좋을 때 패러글라이딩을 한고 산악열차를 타고 융프라우에 간 다음에 라면을 끓여먹고 숙소로 돌아와 맥주를 마실 계획이었다. 그런데 날씨가 곧 눈비가 퍼부을 것처럼 흐렸고 나는 예정보다 일찍 도착해버렸다. 카페라도 찾아서 인터라켄의 풍경을 바라만 봐도 좋았을 텐데, 여행 초보자인 나는 일분일초를 그냥 흘려보낼 수가 없었다.


인터라켄에 오며 지나쳤던 베른으로 가는 길엔 반대쪽 창가에 앉았다. 왔던 곳을 되돌아가는 게 아닌 새로운 곳으로 가는 기분이 들었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여유를 부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혼자서 그런 여유를 만들 자신이 없어 베른이 한눈에 보인다는 유명한 공원을 찾았다.


장미공원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아직 장미가 피지 않아 황량한 공원 여기저기엔 쌀쌀한 날씨에도 꽤 많은 이들이 자리를 잡고 베른 시가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 역시 어느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안갯속에 어렴풋이 보이는 고풍스러운 시가지를 감상하다 이내 인터라켄으로 돌아왔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그곳의 모두가 함께 있기 때문인지 조금 외로워졌다. 여행이 끝날 무렵에야 혼자임을 느꼈던 것 같다.


인터라켄에서 지내는 삼일 동안은 점심은 대부분 빵이었고 저녁은 대부분 라면이었다. 짐처럼 느껴지던 컵라면과 김치가 진가를 발휘한 날들이었다. 해가 빨리지는 여섯 시가 되면 일정을 끝낸 이들이 숙소에 모여들어 함께 고기나 맥주를 마시며 오늘 다녀온 곳을 자랑하고 추천했다. 추운 나라에 있는 집들이 어째서 훈훈하게 느껴지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별다른 일정과 정보가 없던 나도 같은 방을 쓰던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다음날 일정을 계획했다. 숙소 창 밖으로 바라본 풍경조차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스위스였기에, 어디를 가든 실망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쩌다 보니 퇴사한 사람들끼리 한 기차를 타고 하루 동안 같이 다니며 비슷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한참을 기차를 타고 가다 방향이 잘못된 것을 알아채고 왔던 길을 두 번이나 되돌아가는 일이 생겨도 그 상황까지 추억으로 받아들였다. 여행자의 여유일지도 모르겠다. 시시각각 급변하는 날씨와 자꾸만 실패하는 기차 환승에 목적지를 피르스트에서 쉴튼 호른으로 변경하면서도 뭐가 그렇게 웃겼는지 모르겠다. 화창한 쉴튼 호른의 풍경에 감탄하면서도 반사된 햇빛에 눈이 부셔 오분도 채 되지 않아 전망대를 떠나는 상황이, 내려가는 케이블카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끼어든 무리에 일행과 떨어지게 된 상황이, 반나절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 배를 채우려고 산 빵이 너무 맛없어서 먹을 수가 없는 상황 모든 게 재미있었다.


인터라켄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날씨는 여전히 안 좋았다. 큰 마음먹었던 패러글라이딩은 안갯속을 헤매는 기분이었고 기대했던 융프라우는 오르는 대신 쉴튼 호른에서 마주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먹은 것은 빵과 컵라면 밖에 없었고 한겨울이나 다름없던 날씨에 경량 패딩에 의지한 채  온종일 덜덜덜 떨면서 돌아다녔다. 그럼에도 함께 한 이들이 있어서 다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긴장했던 패러글라이딩을 마치고 돌아온 숙소에서 멋지다고 추켜세워주고 융프라우를 배경으로 열심히 셔터를 눌러주고 서로 맥주를 나눠주는 밤을 보냈다. 4월의 스위스 날씨에 무지해 얇은 옷차림을 하고 있는 서로를 놀리면서 결국은 서로를 걱정해주고 다음날 같은 곳으로 떠날 이들을 염려하며 하루 동안 겪은 우여곡절을 전했다.


같은 시기에 그곳에 머물던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 우연이 만들어준 가장 좋은 추억이 되었다. 인터라켄을 떠나며 진심으로 서로의 여행이 무사히 끝나기를, 돌아가는 삶 또한 행복하기를 다시 한번 응원했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응원을 받으며 유난히 짧게 느껴지던 스위스 일정을 마쳤다.



아쉬움을 달래는 맥주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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