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이다정
깡마른 고등학생 소녀 다정이 어두컴컴한 방 안에 숨어들었다. 퇴근한 아버지가 방금 집안에 들어온 참이었다. 아버지는 어색한 눈으로 딸을 쳐다봤고, 다정은 말없이 고개만 조금 수그렸다. 그게 부녀간 인사의 전부였다. 딱히 무언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오래전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게 어색해졌다. 아버지는 딸에게 뭐라 한 적이 없지만, 다정은 그냥 아버지가 싫었다. 오해가 쌓이고 쌓여 아버지와의 관계는 갈수록 안 좋아졌고,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이 상황이 좋아질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미래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졌다. 어쩌다 아버지가 말을 걸면 가슴이 철렁했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대화라는 건 미래를 염두에 두고서 하는 행위이다. 아버지와의 앞으로의 관계, 그것을 가슴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다정은 위축되었다. 뭔가 더 나은 선택지가 분명 있을 테지만, 다정은 아버지와 마주하면 자신의 방 안에 들어가는 것밖엔 할 수가 없었다.
다정은 침대에 누워 웅크렸다. 밖엔 비가 왔다. 이불은 축축했고 기분은 멜랑꼴리했다. 다정은 어릴 적 시골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도 비가 내렸다. 풀잎에 작은 달팽이가 앉아있었고 다정은 쭈그려 앉아서 그것을 관찰했다. 이윽고 검지를 내밀어 그것의 한쪽 눈을 만졌다. 그 순간 눈이 쏙 들어가 버렸다. 달팽이의 남은 눈도 마저 들어가게 했다. 회상을 마친 다정은 처음 누운 자세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메마른 눈으로 방의 광경을 응시했다.
다정의 방은 원래 창고로 쓰던 방이었다. 벽지는 오래되어 노랬고 베란다엔 박스와 잡동사니가 가득했다. 방을 조금 비워내고 그곳에 부모님이 십여 년간 쓰던 퀸사이즈 매트리스 하나를 놓아두었다. 방은 비좁아서 말하자면 침대 위가 그 방 공간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는 옷걸이에 교복이 걸려있었고 작은 책상 옆에는 직사각형의 거울이 하나 달려 있었다. 다정은 그 거울 앞에 서면 증명사진을 찍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또래 아이들처럼 거울 앞에서 이런저런 표정을 지어 보이거나 셀카를 찍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유난 떨 만큼 자신의 얼굴이 잘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짓을 하느니 차라리 무표정으로 얌전하게 거울을 보는 것이 더 마음 편했다. 그렇지만 오래전부터 전신거울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다. SNS 속 사람들은 하나같이 전신거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건 다정의 언니 혜경 또한 마찬가지였다. 집 안에서 유일하게 혜경의 방에만 전신거울이 있었는데, 그녀는 거울 앞에서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렸다. 다정은 언니의 계정을 몰래 훔쳐봤다. 둘은 서로 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정은 언니의 방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다만 그녀의 전신거울을 문틈으로 힐끔거릴 뿐이었다. 한편으로는 전신거울 따위 없는 편이 더 나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다정은 그래도 한 번쯤 자신의 방 안에서 자기 전신을 봤으면 하는 소망을 품었다. 그러나 결국엔 마음을 접게 되는 것이다.
다정의 여름방학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이 지나가는 중이었다. 그저 침대 위에서 뒹굴며 휴대폰만 들여다볼 뿐이었다. 동영상 속 사람들은 모두 멋진 휴일을 보내고 있었지만, 다정은 아니었다. 거의 한 달 가까이 침대에서 휴대폰만 보고 있었으며 오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다정은 비참함을 느꼈다. 갑자기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생 때 공원에 떨어진 꽁초에 불을 붙여 한 번 빨아본 적이 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맛도 향도 기억나지 않았다. 왜 느닷없이 담배가 떠오른 건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아마 그것은 뭔가를, 자기 자신을 학대하고픈 심정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정은 평소 단정하고 깨끗한 걸 좋아했다. 물을 좋아했고, 교복을 좋아했다. 다정의 책상에는 늘 탁상용 물컵에 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고, 머리맡 옷걸이엔 교복 셔츠와 치마가 단정하게 걸려있었다. 다정은 자기 교복을 자신이 다림질했다. 어머니는 딸의 그런 모습을 마음에 들어 했다. 하지만 그건 딱히 엄마를 위해서 하는 행위는 아니었다. 다정은 교복을 다림질하면서 안정감을 느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집안일이 있다는 사실 자체에 위안을 얻었다. 다정에게 어느 것 하나라도 좋아하는 게 있다는 건 다행스런 일이었다. 세상 그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삶은 지옥과도 같기 때문이다. 다정의 방 안에는 인형이나 장식품이나 포스터 같은 게 단 하나도 없었다. 그 대신 교복이 걸려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바로 그것이 문제이기도 했다. 교복은 언젠가는 벗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정 역시 그 부분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교복을 입지 못한다. 그 사실을 떠올리면 우울해졌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으며, 때 이른 그리움을 느꼈다.
비가 잦아들고 있었다. 다정은 휴대폰으로 내일의 날씨를 확인했다. 비가 그친 후부터 기온이 크게 올라 태양 가득한 일요일이 예고되어 있었다. 내일은 밖에 나가야겠다고 다정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