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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레인 Feb 20. 2023

주택 살이의 진화론적 교훈

최후의 생존자는?


코스트코에서 산 팀홀튼 커피를 드롱기에 내려 토론토 머그에 부었다. 나트렐 우유를 조금 더한  잔을 들고 이케아 의자에 앉아 창밖을 봤다. 오늘도 옆 집 중국인 아주머니는 화단 정리에 분주하다. 북미와 유럽의 기업가 정신을 음미하며 아시안 이웃과 인사하는, 그래서 다정한 캐나다스러운 휴식 시간이다.


우리 집 뒷마당으로 시선을 돌려 본다. 범죄 예방보다는 옆집과의 경계 짓기에 충실한 울타리 위로 오늘도 청설모 한 마리가 빠르게 지나갔다. 설치류 포비아 중환자였던 나도, 매일 창 밖으로 이 녀석들을 만나다 보니 가끔은 그들이 귀엽다는 생각이 . 아주 가끔은 너구리도 찾아왔었다. 가장 귀여운 손님은 오리였다. 진눈깨비가 잦던 4월의 어느 날, 청둥오리 커플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현관문을 연 나를 보고도 멀뚱할 뿐이었지만, 종종걸음이 그린 궤적을 보니 그들의 목적지는 애초부터 우리 집이었던 것 같다.

우리 집에 왜 왔니


이 집은 캐나다에 오기 한 달 전 미리 구해둔 곳으로 이웃과 벽을 공유하는 2층 주택(타운하우스)다. 콘도나 아파트에 비해 렌트비는 비싸지만, 이웃집을 지독하게 배려해야 했던 아파트 생활을 1년이라도 벗어나보고 싶었기 때문에 부담을 감수하기로 했다.



활기로운 주택 생활


마침내 층간소음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아이들은 늦은 밤에도 마음껏 뛰고 피아노를 친다. 마당 효용도 꽤 쏠쏠하다. 여름에는 물총놀이를, 가을에는 바베큐를 즐겼고, 함박눈이 쌓인 날은 아이들이 포슬한 땅에 뒹굴 동안, 나는 눈 사이에 냄비를 심어 보리차를 식혔다. 날씨가 풀리자 튤립 몇 송이가 마당의 돌을 뚫고 나와 깜짝 놀랐다. 또 어느 날은 구석에 나팔꽃과 데이지가 자기들끼리 꽃대궐을 만들었다. 나는 종종 꽃을 데려와 식탁 창가에 올렸다. 해가 쨍하게 드는 식탁에 화사한 생명력이 더해져 식욕까지 돋운다. 럴 때는 나도 마사 스튜어트가  기분이다.


동네 산책을 하다 보면 캐나다인들의 익스테리어(exterior)에 대한 진심을 느끼게 된다. 가장 잘 드러나는 때는 핼러윈과 크리스마스 철인데, 마트 업계는 이미 한달 전부터 진열대를 갈아 엎어 시즌을 예고한다. 동네 사람들은 10월부터  앞에 호박, 해골 따위를 전시하다가 11월 중순이 되면 크리스마스 트리와 현관 리스(wreath) 교체하고, 라이트가 달린 사슴이나 썰매 조형물 같은 것을 앞마당에 설치해 마무리한다. 지금 우리 집 현관에도 포인세티아 화분이 소박하게 서 있다.


특별한 시즌이 아니어도 집 앞을  정돈하는 것은 중요한 일 중 하나다. 영화 <플립(Filpped)>에는 여주인공의 집인 베이커네가 수풀이 창문까지 올라올 정도로 관리를 안 해서 이웃들로부터 비웃음과 비난을 사는 장면이 나온다. 집의 외관은 집 주인의 취향과 경제적, 시간적 여유를 암시하며 때로는 동네 분위기까지 영향을 미치는데 심한 경우 민폐로 여겨지는 것 같다. 우리 옆집 아주머니는 베이커의 이웃처럼 우리 집을 뒤에서 흉보지 않았다. "그 집 잡초 좀 깎아 주실래요? 우리 집 화단까지 넘어와서요" 라며 대놓고 불만을 제기했다. " 눈에는 잡초가 아니고 예쁜 잔디인데요?" 라는 말은 차마 못 했다. 나는 그 후 잔디 깎는 할아버지에게 돈을 내 집 앞을 정리했다.


주인을 잘못 만난 우리 집 마당들. 만약 다육이 금손 우리 엄마, 텃밭 농사의 달인 우리 아빠의 돌봄을 받았다면 베르사유의 정원이나 채식주의자의 천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신분 상승에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덕분에 스스로 꽃을 피우기도 했으니, 그만하면 괜찮은 거 아닐까.


내버려 둔 마당에서



부 지망생도 이렇게는 못 살지


백조의 우아함은 안 보이는 발길질로 완성된다 했던가. 이렇게 소박한 활기로 가득 찬 주택 살이는 서울 아파트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노동을 요구했다. '눈 치우기'는 '잔디 깎기'와 함께 집밖일의 쌍두마차다. 지난겨울은 적설량이 최근 10년 중 최고치였다고 한다. 자고 일어나면 눈이 무릎 넘게 쌓여 있어 차도 못 뺄 지경이었다. 이 눈을 치우는 것은 나와 이웃의 안전을 도모하는 일로 제 때 완수하지 않으면 또 한 번 이웃의 눈총을 사게 될 것이었다. 결국 아침마다 피할 수 없는 삽질이었다.


집안일도 만만치 않다. 기존보다 면적이 넓어지기도 했지만, 1층, 2층, 지하실로 분리된 구조로 동선이 끔찍하게 길어졌다. 지하실에 있는 구형 세탁기는 남은 시간 알림이나 벨소리 기능이 없어 수시로 먼 지하실까지 나를 오라가라 한다. 청소 시간에는 유선청소기 코드를 이 벽 저 벽 옮겨 꼽다가 진을 다 뺐다. 나무로 만든 집 안 구석구석의 먼지는 쌓이는 것이 아니라 솟아나는 것 같았으며, 치워도 치워도 나오는 두 여자의 머리카락은 라푼젤의 그것일까, 국수기계의 면발일까. 왜 3개나 있는지 모를 건식 욕실의 장점은 여전히 미스테리다. 개미 박멸과 거미줄 제거에 대해서는 쓰지도 않으리라.


새벽배송이 없는 곳에서 세끼를 해 먹다 보니 거의 매일 장을 봐야 했고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돌아서면 또 밥때가 되었다. 여기다 청소까지 하고 나면 하루가 다 간다. 전업주부는 나의 로망이었건만, 하루만 안 해도 티가 나는 집안일은 해도 해도 티가 안 나는 게 너무나 분하고 원통하다. 한 때 로봇청소기의 편리와 손걸레질의 꼼꼼함을 동시에 지향했던 내가 기존의 청소 품질을 유지하다가는 번아웃이 올 것 다. 이 살림지옥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그럼 한 번 치워볼까



더럽게 진화했다.


가장 강한 자, 가장 영리한 자, 혹은 가장 부지런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변화에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는다.

마침내 나는 더러운 자로 진화했다.

 가사노동의 홍수에생존하기 위해.


통돌이 세탁기 중앙의 봉 때문에 이불 빨래가 어려웠다. 이불을 넣는 건 성공했는데, 이불이 엉켜 안 돌아갔다. 코인 빨래방은 개털이 쌓인 카펫과 흙 묻은 신발을 빠는 사람들이 있다 해서 포기했다. 그래서 이불 빨래를 안 한 지 1년이다(흠...). 예전에는 옷을 색깔별로, 속옷과 양말을 구분해서 헹굼을 5회 이상 했는데, 지금은 한 번에 때려 넣고 기본 헹굼만 한다. 이 시대의 수자원 파수꾼이다.


청소 횟수가 줄었다. 며칠에 한 번이 XX에 한번 정도로 줄였다(XX는 비밀). 물걸레질은 아예 안 하고, 청소기도 거의 안 쓴다. 대신 찍찍이 테이프와 부직포 밀대로 슥슥 밀어 큰 먼지와 머리카락 없애는데 주안점을 둔다. 어차피 물청소가 불가능한 화장실은 거의 물티슈로 치운다.


이렇게 살아보니 죽지 않더라. 오히려 이렇게 해서 아낀 시간에 더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이런 본격 주부 에세이도 쓸 수 있다. 약간 더럽게 살면 면역에 도움 된다는 위대하고 놀라운 인류애적 연구사례 시간을 번 덕분에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의 아파트로 돌아가면, 분명 자연과 자유를 만끽하던 주택 생활몹시 그리워질 것이다. 하지만 한번 가사노동에 식겁해 본 경험이 아쉬움을 다독일 예방주사가 된 셈이다. 혹시 아파트 인터폰이 울려 우리집에 코끼리를 키우냐는 아랫집의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작지만 반짝이는 거실에 알집매트를 깔며 담담하게 미소 짓겠다. 지금이 참 좋지만 이 생활이 영원하길 바라는 건 아니다.



눈으로 식히는 보리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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