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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레인 Mar 25. 2023

풍경화가도 되어 보고

@ 모레인 레이크


얼마 전 시누이로부터 그림 그리기 키트를 선물로 받았다. 'Paint by Numbers'라고 적힌 상자에는 번호가 매겨진 아크릴 물감, 작은 붓, 그리고 캔버스가 들어 있다. 캔버스에는 이미 밑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작은 칸마다 찍힌 숫자에 맞춰 색을 채우면 전체 그림이 완성되는 방식이다.


말 그대로 상상력이 결여된 작업이지만 이 순도 100%의 단순함이 나를 무아지경으로 몰아갔다. 붓끝에 물감을 찍어 처음에는 경계 안쪽부터 살살 칠하다가 남은 부분은 과감하게 퍽퍽 칠하는데, 이때 아크릴 물감이 캔버스에 착 달라붙는 맛이 짜릿하다. 목과 손목은 꽤 아프고 시력도 다소 감퇴하는 것 같지만 정신적 스트레스는 전혀 생기지 않는데, 재능은 없어도 꾸준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사진에서 본 그림이 된다는 걸 확신하기 때문이겠다. 그러다 보니 잠깐 7번만 칠하자 하고 자리에 앉았다가 8번까지만 더 채우자, 어 여기도 7번인데 못 봤었네, 하다가 하교 시간이 된 걸 알고 화들짝 놀라 그제야 부랴부랴 붓을 놓고 일어나기 일쑤였다.


그리하여 열흘에 걸쳐 작품 하나를 완성했다. 가까이에서 보면 살짝 징그러운데 멀리서 보면 그럴듯하다. 제목을 <보랏빛 모레인 호수>라 붙여 본다. 창의적인 그림 가이드 덕분에 실제의 호수와는 달리 그림이 전체적으로 보라 분위기를 내서.


시키는 건 잘 하는 편




모레인 호수(Moraine Lake)는 앨버타 주 레이크 루이스 지역의 빙하 호수다. 밴프 국립공원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이곳에 왔다. 떠다니는 목재와 돌무더기를 따라 걷다 꼭대기에 오르면 10개의 산봉우리에 폭 담긴 호수를 내려다볼 수 있다. 모레인이라는 이름은 이 지역이 철도 건설로 들썩이던 1900년 전후, 지도 작성에 참여하던 윌콕스라는 사람이 산기슭에 쌓인 돌무더기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모레인은 '빙퇴석'이라는 뜻). 그가 회고하길 이 호수를 바라보던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30분이었다는데, 나도 꽤 그랬던 것 같다. 이 아연실색할 경치 앞에서 누군들 그런 클리셰를 피할 수 있을까.


나 아님
모레인의 화가들


모레인 호수가 풍경화의 모델이 된 역사는 최소 그 이름만큼 오래된 것 같다. 트레일 정상에 설치된 안내문에는 빅토리아 시대(?) 드레스 차림의 한 화가를 담은 그림이 있다. 100년 전 이곳의 철도회사가 기차여행을 홍보하기 위해 사진사와 화가들을 고용했는데, 그들 중 한명일 것이다. 당시의 그림을 검색해 봤는데, 사진은 있지만 그림은 안타깝게도 못 찾았다. 대신 밴프 다운타운의 화이트 뮤지엄(Whyte Museum)에서 다른 화가들의 로키 산맥을 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풍경화, 특히 옛날 풍경화들이 전하는 감정이 참 묘하다. 내가 아는 장소를 액자 속에서 보고 그 옆에 적힌 먼 과거의 작품연도를 확인하면, 연극무대에 설치된 뒷배경은 고정된 채 배우들만 하이퍼랩스처럼 계속 바쁘게 교체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인간들은 한철 손님일 뿐이라는 생각도 들고.


작년에 몬트리올 미술관에서 본 1880년대에 그려진 나이아가라 폭포 그림도 떠오른다. 그림의 분위기는 고풍스러웠지만 풍경 자체만은 현재 모습과 다른 점이 전혀 없었다. 폭포수가 수면에 부딪히며 다시 물기둥처럼 솟아오르는 모습이 너무 생생해서 마치 폭포수의 천둥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100년 전의 화가든, 폭포 배경 셀카나 찍는 지금의 나든, 튀는 폭포수 물방울에 본의 아니게 세수당한 경험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10년이 넘게 변변한 취미생활 하나 없이 산 것 같다. 회사에서 월급값 하고, 집에서는 가족의 의식주 챙기기에 온 시간을 쏟았다. 그나마 배운 자전거도 애들 동기부여시킨다고, 최애 취미라 주장해 온 요리도 식구들 먹이느라 한 것 아닌가. 반년 사이에 브런치 작가도 되어보고, 비록 따라 칠하기지만 풍화가도 되어본다.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이렇게 많은 걸 왜 몰랐을까. 이번 휴직에서 자주 하는 생각은 <나만 좋자고 하는 일도 하자, 언제든 새로운 걸 시작할 수 있다, 너무 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내 인생의 무대 배경이 크게 바뀔 일은 없겠지만 앞으로 내가 맡을 1인 다역이 살짝 기대되기도 한다. 


Niagara Falls (James A. Aitken, 1846~1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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