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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레인 May 16. 2023

맥시멀리스트로 살 거야

빈티지의 화신


얼마 전 오래 눈여겨본 주방도구를 하나 장만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가족들과 동네사람들에게 꺼내 보였으나 큰 공감을 얻지 못했기에 글이라도 남겨 아쉬움을 달래려 한다. 그건 바로 '레몬 즙짜개'다.


이 물건은 사실 1년 전에 찜해둔 것이다. 집에서 두 시간 거리의 골동품 가게에서 우연히 이걸 본 순간, 갑자기 눈이 새그라워지면서 레몬을 짜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나 안타깝게도 우리 집 식단에는 레몬이 쓰이지 않고, 난 충동구매를 안 하는 편이라 그냥 돌아왔다. 그 후 이 즙짜개를 마음에 담아 둔 채 동네 마트에서 수도 없이 많은 즙짜개를 봐왔다. 플라스틱, 스텐, 투명 유리...위에서 누르는 것, 가운데 넣고 짜는 것... 하지만 이 즙짜개처럼 산뜻한 색감에 적당한 중량감까지 지닌 건 요즘 물건 중에는 없었다.


지난달 볼일이 있어 골동품 가게 근처로 갈 일이 생기자 쾌재를 불렀다. 가족들은 비도 오는데 왜 거길 냐며 질색을 했다. 결국 들이 주차장에서 기다릴 동안 나만 빨리 쇼핑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즙짜개는 1년 동안 새 주인을 만나지 못한 채 낡은 찬넬에 그대로 있었다. 계산대에 즙짜개를 올려놓자 주인아저씨는 나의 탁월한 안목을 (눈빛으로) 칭찬했다.


집에 있는 오렌지가 맛이 없어 주스를 만들기로 했다. 오렌지를 반 잘라 즙짜개의 뾰족한 곳에 올리고 세게 눌렀다. 전기 1w도 쓰지 않는 완벽한 아날로그 방식이다. 한 개를 다 짜도 작은 컵의 1/4도 안 차는 건 아직 내 손기술 탓일 게다. 그래도 맛은 좋았다. 다음에는 사이다와 얼음을 더해 에이드를 만들어 양을 채워야겠다.

오렌지 주스가 되는 과정


1년 전에 골동품 가게에서 사 온 건 사실 따로 있다. 바로 '장신구 접시'다. 크롬 도금된 재질인데, 접시 중앙에 캐나다 재향군인회를 기리는 장식이 되어 있다. 원래는 귀걸이나 팔찌 같은 작은 장신구를 올리는 용도지만 나는 코렐 라면기의 뚜껑으로 쓸 생각이었다. 일회용 랩 대신 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위로 말린 가장자리와 가운데 손잡이가 지지대 역할을 해주어 휴대폰 거치대로도 딱이었다. 한 가지 역할을 기대하고 샀는데, 두 가지 역할을 해주다니, 벅찬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기가막힌 쓰임새


나는 주방가재에 대한 물욕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 욕심에 비해 많이 사지는 않는다. 지름신을 꾸욱 눌러주는 사람은 유튜버 <밀라논나>다. 밀라논나는 낡거나 부실한 물건도 버리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탄생시켜 사용한다. 본인은 궁상맞다고 표현하지만, 내 눈에는 명품 언박싱 영상보다 더 럭셔리하다. 나도 뚜껑이 부서진 야채탈수볼을 버리지 않고 테이프를 발라 쓰기로 마음먹었다. 십수년 전 유행했던 환장할 꽃무늬 가전들과 누레진 가구도 애착을 갖고 닦아가며 쓰려고 한다. 손때는 묻었어도 단단한 물건들을, '이건 내가 소싯적에...' 하며 꺼내보이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밀라논나의 주방


물건을 버리지 않겠다는 결심에는 이미 버린 것에 대한 회한이 깔려 있다. 공교롭게도 내가 주로 버린 것은 남편 거다...+_+ 대표적으로 남편이 결혼 전부터 쓰던 오디오와 스피커를 너무 전축스러운 디자인이라며 중고로 팔아버렸었다. 당시에는 내가 음질에 예민하지 않아서 그 가치를 몰랐던 건데, 이제는 귀가 좀 트였는지 그만한 물건을 지금 사려면 적지 않은 돈이 든다는 걸 안다. (심지어 지금 떠올려보면 디자인도 그리 나쁘지 않은데!)


내 물건 중에 버린 게 후회되는 것은 20대 때 사진이다. 결혼하고 이사하면서 과거는 모두 잊자... 며 시원하게 다 버렸다. 별로 자리 차지도 안 하던 것들인데, 굳이 버리기까지 한 데는 심리적인 이유가 컸을 거다. 새 출발에 대한 각오가 너무 장렬했달까... 뒤늦게 그때 추억을 몇 장이라도 건질까 싶어 친구 둘에게 연락해 혹시 사진 좀 갖고 있냐고 물었더니, 자기들도 다 버렸단다. 너희도 과거를 지우고 싶었니.


아쉽긴 하지 앞으로 잘 하면 된다. 추억을 머금은 오래된 물건들을 버리지 않고 귀하게 품을 것이다. 이제 나는 "맥시멀리스트"살겠다. 새것 수집가가 아니라 "빈티지의 화신"로 말이다. 빈티 말고 Vintag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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