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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누의 서재 Dec 17. 2020

자연은 어쩌면 가장 불평등한 존재

서평 시리즈 #85 : <탄소사회의 종말> 조효제

자본주의라는 신이 이끌어가는 세상에서 불평등은 당연한 자식이 되어버렸다. 능력주의라는 신념 아래에서 상대적으로 쉽게 엘리트가 될 수 있었던 구시대의 엘리트들은 자녀들을 엘리트를 육성하며 엘리트주의 시대를 만들어버렸고 부와 권력, 명예, 계급의 불평등을 세상에 퍼뜨려왔다. 가진 자는 더욱 가지게 되고 가지지 못한 자는 더욱 가지지 못하게 되는 것이 세상의 당연한 이치가 된 것만 같다. 그럼에도 가진 자에게도, 가지지 못한 자에게도 온화한 미소로 '평등'이라는 세상 따뜻한 단어를 선물할 것만 같은 존재가 있다. 바로 우리네가 밟고 있는 지구, 우리 곁에 있는 환경이라는 거대한 존재이다. 


1980년대 후반. 미국 전역은 폭염에 휩싸였다. 마이클 조던의 도시로도 유명한 시카고에도 무더운 땡볕은 강렬하게 내리쬐었고 사람들은 턱턱 숨이 막혀만 갔다. 그리고 1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결국 자연재해라 할 수 있는 폭염 앞에 스러져갔다. 더위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대부분 시카고 빈민가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조금 부족하게 먹고, 조금 좁은 집에서 사는 것이 더위를 이겨내는 데에 그토록 큰 난관으로 다가갔을까? 아니, 그보다는 치안을 위해 온 집안의 창문을 두터운 나무판자로 막은 채 못질을 꽝꽝 쳐대야 했던 '빈민'으로서의 환경이 그들에겐 더 큰 산이었을 것이다. 냉방시설 따위는 없이, 그전 몇 해는 그럼에도 겨우겨우 흐르는 땀으로 더위를 이겨냈다지만 그해의 더위는 도무지 이길 방법이 없었을까. 대피시설까지 향하는 대중교통조차 몇 편 존재하지 않았던 그해 그곳의 빈민들은 우리의 어머니 자연이 내뿜는 '재해'같은 열기 아래에 그렇게 스러졌다. 


아니, 곁에 있기에 신경조차 쓰지 않는 자연이라는 존재는 가장 불평등하다. 순수 과학적인 측면으로 접근한다면 대수롭지 않게 보일 수 있는 사소한 이야기들은 사회과학적 시선을 만나는 순간 암담한 '현실'로 다가온다. 빠르게 높아지는 해수면 때문에 국토의 대부분이 잠길 위기에 처한 국가들에게 바닷물은 '자연' 또는 '환경'이 아닐까? 사막화 되는 중동의 거친 지형 속에서 물을 구하지 못하는 부족민들에게 '메말라가는 땅'은 환경이 아닐까? 막대한 부로 높아지는 바닷물을 막을 수 있는 방벽을 칠 수 있는 이들에게도, 석유라는 검은 황금으로 사막 한가운데에 자본의 섬을 만들 수 있는 이들에게도 앞서의 무시무시한 존재들은 환경이다. 다만 다가오는 그 느낌이 다를 뿐이다. 



<탄소 사회의 종말>은 어쩌면 가장 불평등한 존재인 지구의 환경을 사회과학적으로 바라보는 책이다. 자신들이 죽고 난 뒤의 일이 될 '지구 온도 2도 상승'은 과거의 역군이었던, 현재의 기성세대들에게 먼 나라 이웃 나라 이야기이다. 무엇보다 과학적 접근법이 요구되는 기후변화라는 담론이지만 과학적 프레임을 통해서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없는 것이 오히려 현실이다. '폭염 사망률 500퍼센트'라는 다소 자극적인 프레임으로 이야기를 꺼내야 비로소 말귀를 알아먹을까. 아니, 어쩌면 기후변화의 거센 반격에도 끄떡없을 자본주의 사회의 승리자인 부자들에게는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는 명제일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저자는 인권이라는 새로운 시각을 기후변화에 곁들여 사회과학적 해석을 시도한다. 수많은 역설과 방임 속에서 과학적 접근은 기후 변화를 '해결'하고, 변화된 기후에 '적응'하는 데에 끝끝내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은 소비와 허영심으로 만들어진 세상이다.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개선하면서 시작된 영국의 산업 혁명은 유례없는 풍요를 가져왔다. 세상에 없던 진귀한 물건들을 대량으로 만들어내던 공장들이 돈방석에 앉자 탐욕스러운 사람들은 기업들을 우후죽순 만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소비력을 능가하는 제품을 생산하게 된 기업은 사람들에게 소비를 강요해야만 했다. 과잉생산된 재화를 허영심을 통해 과잉소비하게 만드는 특별하다 못해 기괴한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소비가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사회는 푸른 별 지구에 막대한 부하를 안겨주었다. 코로나19로 2020년 초 중국, 인도 등 탄소 배출량 상위권을 차지하는 국가가 대대적으로 공장 가동을 중단하자 눈에 띄는 탄소 배출 감축이 일어난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인간은 기후 변화에 지구상 그 어떤 존재보다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연간 600억 마리가 소비되는 '닭' 때문에 지구의 지층에 '닭 뼈'가 흔적으로 남고 있다는 '인류세'의 시대에 가장 위협적으로 기록될 사실은 바로 인간이 내뿜는 탄소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연간 40억 톤이 넘는 탄소가 배출되고 있다는 '과학적' 이야기는 '인간적인' 인간들에게 큰 자극이 되지 않는다. 일견, 이해가 된다. 당장 먹고 살 문제가 급한 이들에게 기후 변화가 무엇이랴.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디젤 연료 가격을 올리자 운송업에 종사하는 사람 등이 대대적인 시위를 일으킨 것은 기후 위기와 사회적 접근은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때문에 기후변화와 환경 문제는 사회적 맥락에 맞게 적용되어야 한다. 3시간 만에 13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방글라데시의 태풍 피해 현장과 미국의 허리케인 피해 현장은 다르게 해석되어야 한다. 사회적으로 방지가 가능한 영역이었던 재해와 말 그대로 청천벽력과 같은 재해는 이제는 다르게 대응해야 한다. 기후변화를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 각기 다른 계획을 제시해야 한다. 특정 집단에게만 행동을 요구할 수는 없지만 사회적 맥락을 고려한 접근은 분명 필요한 것이다. 이때 기후 변화에 기여한 바가 작을수록 역설적이게도 기후 변화의 큰 피해자가 되는 상황 등을 다양한 관점에서 살피는 지혜가 우리 시대가 수행해야 하는 당면 과제가 될 것이다. 


어쩌면, 지금껏 우리 사회가 기후 변화를 바라봤던 방식은 실패했을지도 모르겠다. 몇몇의 선량한 시민과 학자들이 변화를 촉구했지만 과학적 접근법은 지구인의 마음에 접근하지 못했다. 1도, 2도쯤 상승한다는 조그마한 수치들이 마음에 내키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다. 기후변화는 그만큼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오늘 내일의 일은 아닐 것이라는 시의성의 문제, 선조들이 차곡차곡 만들어나간 소비 지향적인 사회상, 너무나 거대한 담론이라는 사실 등 우리의 마음에 도저히 들어올 수 없는 이유 또한 많다. 그렇기에 저자는 오늘의 우리 마음속에 들어갈 수 있는 작은 틈을 찾아내려 노력한 것이 아닐까. 달라진 지구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이 가파르게 증가하는 모습, 부유한 이보다는 부유하지 않은 이가 많은 세상에서 자연마저 자신들을 차별하는 모습을 통해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한 것이다. 비록 그 울림이 과학적 접근과 비슷한 행보를 걸어가며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할지도 모른다. 허나, 그럼에도 끝끝내 효과를 거두지 못한 접근법을 언제까지고 붙잡고 있을 수는 없다. 이제는 다른 시각을 적용해야 할 시간이다. 불평등이라는 가장 민감한 이야기를 통해 기후 변화를 논하는 방식, 어쩌면 가장 불평등한 존재인 자연이 인간을 일깨우는 가장 거대한 존재가 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가장 불평등한 존재인 자연이 전하는 경고, <탄소 사회의 종말>이었습니다. 




* 본 리뷰는 21세기북스의 도서 지원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 출처 : 

1) https://unsplash.com/photos/GrmwVnVSSdU?utm_source=naversmarteditor&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api-credit

2) https://unsplash.com/photos/1qIsv86S79E?utm_source=naversmarteditor&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api-cr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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