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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탁월 Oct 24. 2023

초보 운전 사유집

고속도로를 처음 타던 날

장롱 면허를 1년 째 묵혀두던 어느 날 애인이 내 앞으로 보험을 들었다. 먼지 쌓인 장롱 문을 열어준 것이다. 무려 수백 킬로그램이 넘는 기계를 조작하며 도로 위를 달려야 한다고 생각 하니 아찔했다. 동네에서 유턴, 비보호 좌회전, 두 번의 주차 정도를 간신히 해냈을 때 애인은 제안했다. 고속도로에 나가보자고.


나를 비롯한 초보 운전자의 오해 중 하나는 느리게 가면 안전하다는 생각이다. 천천히 서행하면 괜찮겠지? 라는 착각에 빠져 시내에서도 몇 번의 고비를 넘긴 나는 공포에 떨었다. 고속도로에는 느리게 달리는 차량에 대한 제한도 있다던데. 엑셀을 조금만 깊게 밟아도 심장이 움찔대는데. 그치만 해보지 않으면 영원히 모르는 것들에 대한 호기심, 그것이 또 나를 움직였다. 심호흡을 여러 번 뱉으며 도시를 통과해 고속도로로 나섰다.


| "양보를 하되 줏대는 지키라고?" - 차선 변경

2차선에서 직진만 하고 싶은 마음, 초보 운전자라면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차선이 3개에서 2개로 합쳐질 때마다 나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합류하려는 차를 먼저 보내고 나는 뒤로 빠질지, 아니면 내가 먼저 빠르게 가면서 뒷 공간을 만들어줄지. 순간 판단력을 잃으면 위험할 수도 있다. 상황을 파악하고 결정하는 능력은 어디서나 발휘돼야 하는구나.


논쟁에서 기꺼이 주도권을 잡아야 직성이 풀리는 내가 먼저 양보하며 뒤로 물러날 수 있을까? 이랬다 저랬다 변덕이 심한 내가 줏대를 지키며 빠르게 판단 할 수 있을까? 걱정하며 핸들을 부여 잡은지 어느새 한 시간 반, 나는 깨달았다. 양보와 줏대는 양립 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상대방과 나 모두가 존중 받는 일들이 이 곳에서 벌어지고 있구나. 상황은 이해관계자들이 직접 만들기 나름이다. 서로를 지켜주기 위한 노력이 곧 공존이다.


| "뒤 돌아보지 마" - 길을 잃었을 때

잘못된 경로로 들어선 후 집착적으로 후회했다. 왜 이 길로 왔을까. 그러나 이미 이만큼 온 이상 후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빠르게 다시 길을 찾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안을 모색해야 했다. 후회를 하느라 운전에 집중하지 못하면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시선이 과거로 향하면 전진할 때 앞을 보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뒤돌아보고 싶은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다. 잘 나아가고 있는지 불안할 때, 지난 일에 미련이 남을 때, 후회라는 감정이 들 때마다 고개를 과거로 돌려 확인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버릴 것을 잘 털어내는 것이야말로 삶의 중요한 성찰이 아닐까.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훌훌 털어버릴 때, 비로소 지난했던 삶의 한 부분이 완결될지 모른다.


| "언어는 어디에나 있다" - 비상등

창문을 열고 직접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직은 사이드 미러로 뒷차와의 거리감이 잡히지 않아 끼어들기를 할 때 주춤거린다. 그럴 때 양보해주는 사람에게는 얼굴을 보고 인사하고 싶을 정도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달려야 하는 운전자들. 대면할 여유는 없으니 비상등으로 대신 전한다. 고맙습니다. 초보 운전자를 기다려 주시다니요.


끼어들어야 하는데 깜박이는 켰지만 선뜻 못 들어갈 때 뒷차는 혼란을 감지한다. 미안합니다. 또 켜보는 비상등. 부디 내 운전 실력을 양해해주길. 고마워요, 미안해요. 두 마디로도 소통이 되는구나. 어쩌면 일상에서도 하기 어려운 말들. 우리는 얼마나 마음 전하며 살고 있는가. 비상등 불빛 하나에도 마음이 녹는데 눈을 보고 직접 말한다면 진심은 더 잘 전해지리라. 고맙다, 미안하다. 수많은 신경전이 사실 이거 두 개로 해결되지 않았던가.


운전을 하면 할수록 핸들을 살살 쥐게 되었다. 팔에 힘을 빼고 부드럽게 돌리니 방향 전환도 오히려 쉬웠다. 온 몸을 경직시키고 힘을 주며 나아간다고 능사는 아니다. 긴장을 풀고 차분한 마음으로 간다면 어디든 나의 길이 된다. 처음에는 오로지 앞만 향하던 눈에 이제는 신호는 물론이거니와 사이드 미러도, 룸 미러도, 가끔은 풍경도 들어온다. 넓은 시야와 침착한 마음으로 나는 더 멀리, 멀리 가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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