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지 않고 수학 공부만 하며 여름을 보냈다
앞서 나는 지금 보내고 있는 시간이 마치 여름방학처럼 느껴진다는 말을 했었다. 카페에서 노이즈캔슬링 헤드폰을 끼고 매미 소리를 들으며 수학 문제를 풀고 있으면, 초등학교 여름방학 때로 돌아가 밀린 방학 숙제를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라고.
실제로 나는 약간의 휴식기를 갖고 있는 중이다. 이번 여름 전체를 일하지 않고 공부만 하면서 보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시작한 뒤로 한 번도 이렇게 오래 쉬어본 적이 없는데, 어쩌다 보니 5개월째 쉬고 있다.
사실 처음부터 쉬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올해 5월에 나는 직장에서 잘렸다. 술 때문이었다. 평일에도 새벽까지 폭음을 하는 게 일상이었던 나는 근태가 점점 나빠졌다. 지각은 물론, 무단결근을 하는 날도 많아지고 있었다. 결국 회사에서는 사직을 할 것을 종용했다.
자르는 이유는 정확하게 말해주지 않았다. 지각이나 결근을 할 때마다 술이 아닌 다른 핑계를 댔으므로 공식적으로 회사는 나의 술 문제를 몰랐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 정도의 근태 이슈를 발생시킬 만한 것은 술 문제밖에 없으니, 회사에서도 내 문제를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잘리고 난 뒤에는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잘렸다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웠지만, 술 때문에 잘렸다는 사실이 특히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수치심과 나 자신을 향한 실망감 때문에 7월까지는 거의 술독에 빠져 살았다.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깨어 있을 수가 없었다.
술 때문에 직장을 잃어 놓고도 또다시 술을 마셨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원래 그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어린왕자에 나오는 것처럼 '술을 마시는 게 부끄러워서 술을 마시는' 알코올 중독자들은 실제로도 무척 많다. 나도 그중 하나였을 뿐이다.
수학 공부를 시작한 건 7월 초였고, 학습지를 결제해 풀기 시작한 건 7월 셋째 주부터였다. 그러니까 나는 매일매일 술을 마시며 괴로워하면서도 어떻게든 더 나아지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만취하여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도 관성적으로 수학 문제를 풀었다. 술에 취한 채 푼 문제들은 당연히 틀리기 일쑤였고, 나는 좀 더 잘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8월부터는 술을 끊었다.
술을 끊은 뒤에도 몇 주간은 정신이 맑지가 못했다.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답답했고 공부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그래도 점점 좋아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오답률은 조금씩 낮아졌고 계산 속도도 서서히 빨라져갔다.
어쩌면 수학 공부는 일종의 도피처였을지도 모른다.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 수학 공부를 시작한 건 결코 아니었고, 오히려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이 출발점이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수학은 나에게 피난처가 되어주었다. 직장에서 잘린 건 너무나 큰일이었다. 생계 문제와도 연결되는 데다 자존심의 근간을 뒤흔드는 경험이었다. 그렇게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를 붙잡아준 게 수학이었다. 나는 숫자와 씨름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다.
직업이 없다는 것은 할 일이 없다는 것이고,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백수가 된 지 단 몇 주 만에 낮과 밤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수학은 그렇게 무너진 생활 패턴을 조금이나마 바로잡아 주었다. 날마다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위안을 주었는지 모른다. 그날의 첫 문제를 풀기 시작할 때는 약간 힘들었지만, 다 해내고 나면 어김없이 뿌듯함이 느껴졌고 나는 그 성취감에 중독되었다.
어떻게 될지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삶이라지만, 올해 4월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이렇게 지내게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당연히 회사에 계속 다니느라 여가 시간이라곤 없는 일상이 언제까지고 이어질 줄 알았다. 뜻밖에 찾아온 이 여름방학을 소중하게 쓰고 싶다. 정말로 어린 시절로 돌아가 그 시절을 다시 살면서 결핍을 채울 수는 없다 해도,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다음 단계를 준비하기 위한 시간으로 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