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죽은 이유
* 본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와챠 익스클루시브를 통해 공개된 미국 CBS 드라마 <와이우먼킬>은 오십여 년의 시간에 걸쳐 한 집에서 일어난 세 건의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각 시대 여성들의 삶을 조명한 작품이다. 본 드라마는 세 가정의 이야기를 개별적으로 다루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사회의 모습을 지루함 없이 관통하고 있다. <위기의 주부들>, <프렌즈> 의 제작진과 함께 탄생한 <와이우먼킬>은 캐릭터의 개성과 높은 몰입도로 시청 순위 1위를 기록하고, 수많은 여성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며 화제성을 입증했다.
전형적인 가부장제 속 여성
작품의 첫 에피소드는 1963년, 1984년, 2019년에 걸쳐 저택에 살고 있는 부부 중 한 명이 죽음을 맞이해 실려나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사건의 풀이는 여성을 중심으로 풀어간다. 1963년 저택의 첫 주인이었던 베스 앤은 당시 미국 사회의 심각한 가부장제를 순응하며 살아가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고 퇴근 시간에 맞춰 음식을 차려놓는 “착한 아내”의 역할을 수행한다. 베스 앤은 남성에게 사랑을 받고 단란한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죽은 딸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그의 수동적인 행동은 남편의 불륜 사실을 알고 나서도 변하지 않는다. 본질적인 문제에 집중하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베스 앤의 모습은 가부장제가 무력화시킨 전형적인 여성의 태도로 비춰진다. 잘못을 따져 묻는 대신 성적으로 남편을 유혹할 방법을 강구하는 동시대 여성의 모습은 이 지점을 꼬집고 있다. 방황하던 베스 앤은 내연녀 에이프릴과 친분을 맺으면서 갈등과 안정을 동시에 맞이하는 모순적인 상황을 직면한다.
에이프릴은 목표의식이 분명한 여성이다.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안고 식당에서 일을 하는 그는 정체를 숨기고 자신에게 접근한 베스 앤과 친해진다. 남편과 내연녀를 몰래 갈라놓겠다는 목적으로 다가갔음에도 진심으로 에이프릴을 친구로 느끼게 된 베스 앤은 에이프릴의 조력자로 발전한다. 불륜, 치정극의 전형적인 서사를 드러내고 있는 베스 앤의 에피소드는 그가 남편의 실체에 깊숙이 파고들면서 심화된다. 딸의 죽음이 남편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는 것과 에이프릴의 임신과 함께 자신의 존재가 일시적인 대체품처럼 다뤄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베스 앤은 치밀한 복수극을 위해 각성한다. 온화하지만 서늘한 미소를 유지하던 베스 앤의 복수 계획 속에는 가부장제를 부수고 나온 여성의 능동적인 움직임이 그대로 담겨 있다. 베스 앤은 세 드라마가 다루고 있는 여성들 중 “연대”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인물이다. 꿈을 위해 불법 시술소에서 낙태를 감행하려는 에이프릴을 보호하고,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이웃집 여성을 구출하는 베스 앤은 초반부 드러났던 무력한 여성상을 탈피한다.
가족의 형태
베스 앤이 전형적인 가부장제 속 여성의 성역할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면, 1984년 시몬 부부는 가족의 새로운 형태를 보여주며 이성애 가족 개념을 뒤집는다. 사교계의 유명인사 시몬은 당시 미국의 자유주의 시대상을 반영한 인물이다. 세 번째 결혼으로 만난 남편 칼이 게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이혼을 결심한 시몬은 친구의 아들 토미와 불륜 관계로 얽히게 되지만 서로를 존중하며 가족의 형태를 유지한다. 성소수자와 다양성에 대한 개념이 현저히 떨어졌던 시절 부조리한 시선들을 개의치 않고 의리로 뭉친 시몬과 남편 칼의 모습은, 성애가 주를 이루지 않아도 가족으로 맺어져 연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즐기고 중요시 하는 시몬에게 타인의 시선은 그의 삶에 큰 영향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확고한 신념과 가치관으로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시몬은 그 자체로 능동적이고 강인한 여성이다.
성애를 통해 전형적인 가족의 형태를 재해석 하는 대목은 2019년에 살고 있는 테일러 부부에게도 나타난다. 테일러는 유능한 변호사로 비독점 다자연애를 즐기는 여성이다. 남편과 합의 끝에 추구하던 성생활을 영위 중인 테일러는 애인 제이드를 집으로 들이며 난관을 마주한다. 테일러의 남편은 욕구를 참지 못하고 부부간의 룰을 깬 뒤 제이드를 계속 집에 거주하게 하면서 쓰리섬을 요구한다. 그는 제이드를 만족스러운 성 생활을 선사할 존재라고 인식하고, 욕구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세 사람은 관계에 파멸을 맞이한다. 출신도 직업도 불분명한 제이드는 낙천적이고 따뜻한 언행으로 테일러와 남편에게 위안을 주는 듯 하지만, 결국 속내를 드러내며 남편의 약물 중독을 심화시키기에 이른다. 반사회적이고 폭력적인 제이드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테일러 부부를 위협한다. 이성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가정을 보호하는 테일러와 달리 우유부단하고 의존적인 그의 남편은 가정의 파멸을 앞당긴다.
시몬과 테일러는 모두 강인하고 명석한 여성이지만, 관계를 이루는 가치관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작품은 이성애 중심의 가족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에 다양성을 제시하는 반면, 관계와 성애에 대한 집착이 어떤 파멸을 일으키는가에 대해 보여준다.
그들은 정말 살인을 했을까
“살인이 이혼보다 싸게 먹히지.” 이 대사는 <와이우먼킬>의 첫 에피소드에 나온 대표적인 홍보 문구다. 그렇다면 그들은 정말 살인을 했을까? 작품은 세 주인공이 직접 살인을 저지르게 두지 않는다.
베스 앤은 그가 갇혀 있던 가부장제의 어리석음을 역이용한다. 심각한 의처증으로 가정폭력을 저지르던 이웃집 남성은 자신의 부인이 베스 앤의 남편과 불륜을 저질렀다고 의심하며 집에 들이닥친다. 이는 그가 스스로 분노를 절제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한 베스 앤의 계략이다. 이웃집 남성은 예상대로 베스 앤의 남편에게 총격을 가하고, 그는 죽음을 맞이한다. 임신한 에이프릴은 베스 앤과 함께 살게 되고, 두 여성과 태어난 아이는 단란한 가족으로 함께한다. 이 과정을 통해 복수, 치정극의 클리셰는 연대와 구원의 서사로 탈바꿈된다.
1964년 시몬의 집도 마찬가지이다. 에이즈로 인해 시한부 삶을 살게 된 칼은 스스로 죽음을 택하기로 한다. 시몬은 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곁에 있어주기를 선택한다. 사교 모임에서 강렬한 탱고를 선보이곤 했던 시몬 부부는 칼의 죽음 직전 마지막 춤을 춘다. 사교 모임의 화려함과 쾌락에서 멀어져 온전히 둘만 남아 합을 맞추는 시몬 부부의 엔딩은 다른 두 가정의 모습과 사뭇 달라 보인다. 탱고의 선율과 함께 다른 시간대의 살인을 보여주는 연출은 시몬 부부와 상반된 감정선을 나타내고 있다.
2019년 테일러 부부의 엔딩은 충격적이다. 자신의 정체가 탄로난 것에 분노한 제이드는 테일러와 그의 남편을 죽이려 든다. 불안정한 부부 관계 개선을 위해 이용된 손님 제이드의 분노는 어긋난 욕망과 함께 폭주한다. 가족이라는 범주에 속해야만 하고, 서로를 “보살펴”주는 관계에 집착하는 제이드는 캐릭터 자체로 그 부작용을 입증하는 산물이다. 도덕성 상실과 집착은 잔혹한 폭력으로 발현된다. 제이드로부터 남편을 구한 테일러는 전통적인 부부 관계로 돌아간다. 테일러의 행동은 의문점을 불러일으킨다. 자신을 배신하고 약물에 의존하는 남편을 거두고 부부 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테일러의 모습은 그답지 않게 감정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협적인 존재 제이드를 집에 들이고 다자연애 룰을 어긴 테일러의 입장은 결국 남편과 동일선상에 놓이게 된다.
작품은 테일러 부부가 떠나고 또 새로운 부부가 입주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테일러와 그의 남편이 이성애 가족으로서 관계를 견고히 할 것을 다짐할 때, 방금 입주한 여성은 남편의 불륜을 목도하고 총을 겨눈다. 베스 앤과 시몬이 집을 넘겨줄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작품은 갈등을 완전히 마무리 짓지 못하고 이성애 중심의 가족관으로 급하게 마무리되어버린 테일러 부부의 위험성을 상징한다.
열 편의 에피소드는 여성의 역사와 삶의 단면을 집약적으로 표현했다. 겉으로 보기에 죽음의 연속처럼 보이는 세 가족의 결말은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새롭게 제시하고, 개성있고 강렬한 여성 캐릭터의 참신함을 돋보이게 하고 한다. 우리는 작품을 통해 여성의 연대를 배우고 다양한 관계의 형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제도의 불평등을 깨닫고 문제를 직시한 여성이 어떻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지 보여준 <와이우먼킬>은 단순히 “살인”과 “이혼”이라는 자극적인 단어를 뛰어넘어 시대의 성장을 드러내고 있다.
글.기획/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