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17은 에겐남일까 테토남일까

미키 17과 이모저모

by 둥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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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주인공, 미키는 누구인가?

미키, 그는 지구에서조차 약자였다. 사채업자로부터 쫓기며 도망자 신세였고, 죽지 않기 위해 선택한 차선책이 우주로 도망치는 것, 그리고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이었으니. 그는 사람 자체가 선하다, 아니 자기 밥그릇도 남이 달라 그러면 준다. 아니 빼앗긴다.

자신이 선택한 직업 '익스펜더블'이 어떤 직업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선택한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자신을 돌보고 챙기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함부로 대하게 놔두고, 친구가 함께 하자 그러면 그냥 같이 하며,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례한 질문을 하도록 놔둔다.


이런 그가 극 중 유일하게 감정을 공유하는 인물이 있다. 자신조차 그다지 챙기지 않는 그가 헌신하는 대상이 있었는데 나샤, 여자친구이다.

자신은 목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까치집 머리를 하고는, 나샤의 출근 준비를 아주 세심하게 돕는다.


그는 에겐남일까 테토남일까?

여자친구를 세심히 내조하는 모습은 에겐남 같다는 생각을 언듯 들게 만들지만, 최근에 에겐남과 테토남에 대해 깊이 고민한 메거진 글을 보고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한 메거진의 저자는 '테토남'을 단순히 남성성이 높은 외형과 취향을 가진 사람이 아닌, 주어진 것에 순응하고 그다지 변화를 고민하지 않는, 생긴 대로 사는 사람이라 정의한다. 반대로 '에겐남'은 꾸미는 사람, 다시 말해 자신의 모습을 객관화하고 남성성이 도드라지는 패션과 신발과 헤어스타일을 참고하고, 자신에게 적용하며, 말투와 행동을 고민하는 사람이라 정의한다.

그래서 세심한 분류를 위해 외적/내적 기준을 더해서 '외토', '내토', '외겐', '내겐'으로 4개로 나눈다.

재미있는 분류방법이다. MBTI에 환장하는 사람들이 좋아할 소재다. 어디까지나 재미로 생각해 보는 거지만-

그래서, 미키 17은 외겐 내토남이다. 겉모습은 여리여리, 섬세해 보이지만 사실 그는 자신의 환경에 큰 반항 없이 주어진 대로 흘러가듯 산다. 설령 자기가 좀 여러 번 죽어도, 그래 다음에 프린트되니까 이번 삶은 포기해야지 뭐...라는 마음으로.


그는 강한 걸까 나약한 걸까?

그러한 삶에서 우주로 도망치고 죽기 싫어 죽을 수 없는 사람이 된 그는, 삶을 이어가려는 생명력이 강한 걸까? 아니면 그저 회피할 줄만 아는 나약한 사람일까? 사실 다른 고전적인 영화 같은 곳에 미키라는 인물이 나온다면, 그는 주인공보다 서브 주인공의 캐릭터에 더 어울리는 성격이다.

그리고 참 신기하게도 (어쩌면 주인공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살짝 자아 없는 미키에게 관심을 가지고 지지하는 여성 인물이 극 중에 세명이나 있다. 사랑의 형태는 각각 에로스, 플라토닉, 아가페로 다르지만 이러한 맥락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이 떠오른다. 영화 속 대부분의 캐릭터가 인간실격처럼 살짝, 아슬아슬한 느낌이긴 하다. 끝없이 낮은 자존감과 자신감, 그럼에도 이성이 끊이지 않는 오오바 요조의 모습은 미키와 조금 닮은 것 같기도 하지만, 여자친구 나샤는 마키와 함께 동반자살을 할 바에야 그의 빰을 때리고 밥 챙겨줄 캐릭터라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함선 내에서 배수관보다 더 못한 직업으로 뽑히는, 누구나 피하는 이런 직업을 가진 남자를 여러 형태로 사랑하는 여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나샤, 그의 유일한 여자친구는 함선 내 소방관이자 경찰관이자 보안관이다. 미키 18을 나샤가 가지고 미키 17을 자신이 갖겠다 협상을 제안한 인물 카이는 함선의 대장 케네스 마샬의 말을 빌리자면 '우수한 가임기 여성'으로, 아름답고, 건강한, 똑똑한 인물로 표현된다. 도로시는 우주선의 과학부서에 일하는 과학자로, 외계 행성 종족이 언어체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유능한 인물이다.


주인공은 남자지만,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건 여성 캐릭터

강한 지도자로 손꼽히는 함선의 대장 마샬, 하지만 그 또한 연설 중에도, 대화 중에도 수시로 '더 강하게 나갈까?' 하고 자신의 아내에게 자신의 행동에 대한 판단을 묻는다. 마마보이의 모습, 혹은 청소년기에 머물러있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며, 여성을 자궁으로 보는 뒤틀린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그를 감싸고 대변하는 이는 늘 그의 아내이다. 어떤 발언을 하든 어떤 태도를 보이던 감싸는 모습은 마치 아이를 키우는 모성애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처럼 역겨운 인물에게 '모성애'라는 단어를 적용하고 싶지는 않다.


오래전 영화를 떠올리면 대체로 주체적이거나 자신의 의지, 혹은 욕망을 드러내는 여자는 '나쁜 여자'혹은 '처단 대상'으로 치부되기도 하며, '착한 여자'는 순종적이고 성적욕망의 대상, 감시의 대상, 혹은 판단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영화 미키 17은 어떠한가? 강한 주체성과 의지를 가지고 의회를 개혁, 남자 주인공의 자유와 인권을 되찾아준 이는 여성 캐릭터다.

오히려 권위적이고 복종을 요구하는 남성 캐릭터를 품고, 지지하는 여성 캐릭터 - 케네스 마샬의 부인-은 처단의 대상이 된다.

시대가 바뀌고 영화가 바뀌고 있는 걸까? 영화가 시대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걸까.


미키 17보다 미키 18이 '미키들'을 더 사랑하는 것 같다

미키 17은 계속 미키 18을 질투하기 바쁘다. 오죽하면 자신을 죽이려 몇 번이나 '순진한 악의'를 가지던 이들에게조차 '감사하다'라고 말하고, 자신의 목숨에 조차 쉽게 포기하는 이가 미키 18 - 자기 자신- 에게 분노를 느끼겠는가?

하지만 미키 18은 처음 미키 17을 만났을 때 죽이려던 모습과 달리, 후반으로 갈수록 그 역시 자신이라 여긴다. 미키 17이 케네스 마샬의 저녁에 초대되어선 실험용 가공육을 먹고, 실험용 진정제를 투여받으며 고통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불같이 화내는 건 미키 18이다.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은 아니지만, 그는 '자신'이 당한 불합리한 일에 대해 분노한다. 어디까지 분노하냐면, 마샬 암살을 시도한다.

미키 18은 좀 더 욕망에 솔직하다. 화가 나는 일에 화내며, 갖고 싶은 것을 갖기 위해 아등바등한다.

정말 복제인간의 성격은 다 다를까?

아니면 우리 마음 안에도 밝은 순간, 우울한 순간이 있듯 그저 어느 하나의 모습이 극대화되어 성격이 되는 걸까?


왜 니플하임은 하얀색인가?

눈보라가 치고, 얼음동굴이 있고, 지상에 평지가 대부분인 외계 행성 니플하임으로 그들은 이주를 계획한다.

하지만 SF 영화인 김에, 그냥 공상이 전부인 김에 푸르르고 초원이 가득한, 좀 생기 넘치는 행성이어도 괜찮지 않았나. 행성의 환경에도 봉준호의 의도가 있었을까?

디스패치가 지난 2월 봉준호와 인터뷰를 한 내용을 빌려오자면, "'미키 17'은 2054년 얼음 행성이 배경이지만, 광활한 우주 대신 좁디좁은 우주선 내부를 비춘다." 봉준호 감독은 "내가 SF를 한 이유"라며 "우주로 가고 먼 미래로 떠나도 지지고 볶는 인간의 삶이 결국 똑같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어쩌면, 주된 사건이 일어나는 장면이 우주선 내부인만큼 외부 행성에 많은 비용을 투자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표현할 요소가 많을수록 많은 돈이 들어갈 테니까. 아무것도 없는 흰색의 행성, 눈, 눈보라와 얼음 정도로 충분하다 생각한 게 아닐까.


이러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외계 생명체의 모습은 익숙하면서도 특이하다.

코끼리 같은 발, 아르마 딜로 처럼 동그랗게 변신하는 모습, 갯지렁이처럼 많은 다리는 초원과 같은 평지를 오래 걸어야 하는 동물의 모습에서 가져온 듯하다. 빽빽한 털로 가득한 모습은 겨울 환경에 대비하기 위한 모습 같기도 하다. 어딘가 귀엽기도 하고, 낯설기도 한 모습에 봉준호가 만든 외계생명체의 모습을 많이 집중해서 봤다.


프린팅, 여기저기에서 보인다

영화의 포인트는 프린팅 되는 박자라고 생각한다. 미키들은 한 번에 매끄럽게 인쇄되지 않는다. 두어 번씩 철커덕, 걸렸다가 다시 인쇄된다.

이는 사람을 인쇄하는 모습뿐 아니라 여러 부분에서 관찰된다.

미키 17, 18이 외계 생물체가 가득한 비행선 외부로 나가는 길, 그들이 외부로 나가는 문이 열릴 때 마저 한번 철커덕, 걸리는 모습이 있다.

함선 내를 자동적으로 돌아다니며 움직이는 쓰레기통은 계단을 올라가기 전, 한 번 철커덕, 걸렸다가 움직인다.

기계들의 모습에서 한 번씩 철커덕, 걸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매끄럽지 못하고, 불완전한 모습이 결국 자연스러운 사람이 가지는 모습과 강조해서 대비하기 위해 넣어둔 장치인 걸까?

무언가 의미가 있었을까? 한 번씩 걸린다, 어딘가 마음이 불편하게 걸리는 모습을 표현한 건 아닐까? 아니면 그저 봉준호의 취향일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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