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켓레터 34번째 이야기
가을이 오래 머물고 비로소 겨울이 몰려온 기분이 드는 요즘이에요. 12월에 첫 번째로 다녀온 전시는 일곱 명의 작가들이 참여한 <어떤 삶, 어떤 순간>이라는 금호 미술관의 기획전이에요.
‘예술을 통해 삶의 의미를 다각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고자 했다.’는 이번 전시는 잠시 멈춰 내가 보낸 시간을 되돌아보게 되는 전시였어요. 내가 지나친 일상의 풍경은 무엇이었는지, 지난 1년 내가 보낸 희로애락의 순간이 지금의 나에게 어떤 모습으로 남았는지, 그리고 나에게 여백으로 남는 시간은 언제인지, 이런 순간들이요. 무엇보다 회화와 드로잉, 설치, 영상 등 다양한 매체의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점도 좋았어요. 전시를 보며 떠올리는 삶의 어떤 순간이 모두 다르겠지만 나를 들여다 보는 순간은 언제나 필요한 것 같아요.
편집/이미지 '마니' , 디자인 '임그노드' , 디렉팅 '해리'
미술관 1층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전시는 강운 작가의 <마음산책> 연작(2020-2022) 입니다. 작가의 작업 방식이 흥미로운데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아픈 상처를 마주한 후 그에 대한 글을 나무 젓가락을 깎아 써내려 간 다음 여러 색을 덧칠하고 문지르고 긁어내는 작업을 반복한 끝에 완성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삽니다. 오늘의 힘듦과 고민이 있고, 그 크기도 매일 다르죠. 작가는 자신의 상처를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대신 마음 속을 산책하듯이 찬찬히 들여다 보았습니다. 마침내 완성된 색은 치유의 결과죠. 어쩌면 치유의 과정 중일 수도 있고요.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위로의 방법을 찾고 치유의 시간을 가지기를 바랐다고 해요. <마음산책>을 들여다 보는 일은 곧 나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일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미술관 지하 1층에서는 이성웅 작가의 <Water Drop-A Frozen>을 만날 수 있어요. 인간과 환경, 사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설치 작업에 담아내는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자그마한 조명들로 물방울을 표현합니다. 어둠을 밝히는 수백개의 조명들이 설치된 자리 한 가운데에는 작은 통로가 있어요. 그 통로를 걸어 들어가면 의자가 있는데, 이 의자는 앉아서 잠시 쉬어가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밖에서 보는 것과 조명 사이에 앉아 밖을 바라보는 건 또 느낌이 달라요. 매일 바쁜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앉아서 생각할 시간조차 없는 이 시대를 삶아가는 사람들이 전시를 보는 순간 만큼은 잠시 자신, 혹은 세상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라는 작가의 바람이 담겨 있죠.
박주애 작가의 <밤의 새를 삼켰다>도 작품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며 볼 수 있는 설치 작품이에요. 제주의 곶자왈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곶자왈의 가시덩굴과 식물, 이끼 등을 섬유 재료로 구현해 냈는데 색감이 화려하지만 인위적이지 않아요. 그리고 섬유 특유의 온화함이 느껴지고요. 제주에서 나고 자란 작가는 예술가로서 자연에서 재료를 찾고 모으는 것이 곧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재료를 모으는 것이라 믿는다고 해요. 숲을 산책하듯이, 느린 속도로 걸으며 보면 좋은 전시였습니다.
<어떤 삶, 어떤 순간>에는 자연을 주제로한 두 작품도 눈에 띄어요. 그 중 한 작품은 홍지윤 작가의 <꽃춤>인데요, 수묵화로 그려낸 꽃들이 5m 높이의 천장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대형 현수막에 그려져 있어요. 홍지윤 작가는 자연과 생명의 근원이자 삶의 희로애락을 꽃으로 표현한다고 합니다. <꽃춤>에는 높은 곳에서 꽃들이 추락과 상승을 반복하며 흩날리는 모습이 담겨있어요. 압도적인 작품 크기 덕분에 그 안의 꽃들이 자유롭게 오가는 느낌을 줘요.
홍지윤 작가가 자연으로 표현된 인간의 삶이라면 홍나겸 작가의 <솔라스텔지아-그리고 우리는 살아지고 우리는 사라지고>(2021-2022)는 이상기후와 재난으로 변해버린 삶의 터전을 담은 작품이에요. 자연 풍경과 마스크를 쓰고 뒤로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교차하고 다시 동굴의 물소리, 풀벌레 소리 등이 더해집니다. 인간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망쳐가고 있는 자연이 결국 우리의 삶을 뒤로 되돌리고 있는 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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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소 : 금호미술관
⚫ 주소 : 서울 종로구 삼청로 18
⚫ 관람료 : 5,000원
⚫ 관람시간 : 오전 10시~ 오후 6시(매주 월요일 휴관)
⚫ 기간 : 2022년 11월 25일~2023년 2월 12일
⚪ 문의 : 02-720-5114
전시를 보고 나오니 점심 시간이 훌쩍 지났더라고요. 나이 추워 따듯한 음식을 찾던 중에 들어간 곳은 도라 보울이에요. 삿포로식 스프 커리집으로 올 가을 문을 연 곳이랍니다. 테이블 자리와 더불어 바 자리가 있어서 혼밥하기도 좋은 곳이었어요. 스프처럼 떠먹는 커리가 뜨겁게 달궈진 그릇에 담겨 나오는데 옥수수, 고구마, 레이디 핑거 등의 다양한 야채를 기본으로 닭고기, 돼지고기, 버섯 등이 더해진 메뉴가 있고 매운맛의 정도도 선택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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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소 : 도라 보울
⚫ 주소 : 서울 종로구 북촌로5길 54
⚫ 영업시간 : 오전 11시 30분 ~ 오후 9시
⚪ 문의 : 02-6949-1332
만드는 사람들 - 라켓팀
마니(편집), 임그노드(디자인), 해리(디렉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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