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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창 Nov 13. 2023

권리와 민주주의

시험 문제 풀기 전, omr 카드 인적사항 작성 시간. omr 카드를 받자마자, 사인펜으로 스윽슥, 시크하게 두 줄 긋고 곧바로 엎드리는 녀석이 있었다. 곁으로 다가가 '다했니?' 하고 물으니, 참견하지 말라는 듯 대답도 하지 않았다.


눈은 감았어도 아직 잠들기 전이 확실한데, 시험 감독이라고, 본 적 없는 선생이라고, '네 까짓 놈이 선생이면 뭐 어쩔거냐?' 하는 자세로 버티고 있었다. 보아하니 선은 중학교 때부터 이미 많이 넘어본 유경험자인데, 벼랑 끝 전술전략을 북에서 배워왔는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요 괘씸한 녀석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기엔 내가 아직 너무 사나이라, 이런 아이를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선생으로서 직무유기처럼 보였다. 누가 뭐래도 나는 아직 중증 선생병 환자니까…


"카드가 이게 뭐니, 최선을 다해야지."


등을 두드리자 아이가 꿈틀하였다. 아직까지는 말빨 먹히는 젊은(?) 남선생이니까, 그럼 그렇지. 일어나야지. 하지만 아이는 살짝 꿈틀한 그게 다였다. 여전히 엎드린 채로 '후우' 하고 한숨을 한 번 쉬더니, 조금 움직이나 싶다가 다시 엎드려버렸다. '후우' 하는 한숨은 한 번은 참아준다는 뜻, 아이는 나를 선생, 아니 어른으로조차 보고 있지 않았다.


노크하는 것처럼 다시 아이를 깨웠다.


"똑똑. 이렇게 마킹하면 인식이 되겠니? 얼른 다시 하자."


아이가 다시 한 번 '하아'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아주 천천히 다시 몸을 움직이다가, 슬로우비디오처럼 몸을 드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다시 몸을 멈추고 말했다.


"다 했는데요."


아이 얼굴은 아직 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눈을 제대로 뜨는 순간 잠이 달아날 수도 있으니 조심하려는 티가 역력했다. 아이의 목소리에 낀 스타카토가 신경쓰였다. 아이는 보란듯이 다시 엎드렸다.


"이렇게 하면 마킹 인식 안 될 수도 있어. 다시 하도록 하자."


나는 아이의 몸을 잡아 끌어올리며 말했다. 그제서야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아이는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딱 선생만 아니면 하는 표정이었다. 꽃으로라도 때리면 안되는 시대라던데, 그래도 꽃으로 때리면 아프지는 않을 테니 그건 좀 인간적인 방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 했다고요."


더 이상 말 시키면 폭발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였다. 그래도 쌍시옷을 함부로 남발하지 않는 것은 아이딴에는 나름대로 나를 존중해주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두 번을 강조하지만 아직 나는 사나이였다. 행여 잠을 더 자지 못할까봐 철저히 신경 쓰고 관리하며 말하는 건 분명 잘못된 행동이었다. 평정심을 지키며 비오는 날 우산 쓴 사람처럼 말했다.


"시험 다 친 거 맞아?"

아이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네."

"정말 최선을 다한 거 맞아?"

"네."

아이는 도인처럼 눈을 감고 말했다.


"너는 어떻게 문제도 안 읽고 최선을 다했다 하니?"


아이를 공박하기 위한 승부처였다. 그런데 의외로 역습에 당했다.


"저 원래 중국어 모르는데요."


뭐라고? 원래 중국어를 모른다니?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발언이었다. 중국어는 국어나 사회처럼 상식으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없었다. 여기에 아이는 확인사살 차원으로 내게 한 방을 더 날렸다.


"선생님은 중국어 알아요? 문제 풀 수 있어요? 문제 한 번 풀어보세요."


얘가, 눈을 감고 말하더니 진짜 도인이었구나 싶었다. 중국어를 아냐니? 문제를 풀 수 있냐니? 어떻게 저런 말이 나왔는지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나도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지금 상황에선 나라고 딱히 풀 수 있는 문제가 없었다. 네가 아는 게 없어 문제를 풀지 못하는 것처럼 나도 아는 게 없어 문제를 풀 수가 없다는 말이었다. 나는 완벽하게 ko패 당했다.


나도 궁여지책으로 몇 마디 더 주저리 주저리 대기는 했다. 너는 너의 미래를 위해 시험 전에 공부를 했어야 하는 것이며, 공부를 했으면 이렇게 무성의 하게 마킹하지 않았을 것이며, 최선을 다하는 습관을 들여야 너의 미래가 바뀔 것이라 그저 따다다다 했다. 하지만 아이는 나를 배려하지 않았다.


"싫은데요. 제 권리인데요."

나는 덜 맞았던 한 방을 마저 맞았다. 이쯤되니 이제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래. 네가 하고 말고는 네 권리가 맞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니까, 너는 자유권을 가지고 있으니까, 네 말이 맞다. 불현듯 '자유권에는 신체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언론·출판·집회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어.'라고 말하던 사회 선생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미 학교에서 충분히 배운 내용이었다. 이제는 배운 내용을 실생활에 적용할 차례였다.


시험 시작 종이 울렸다. 시작종에 맞춰 다시 엎드린 아이는 마침종이 다시 울릴 때까지 내내 엎드려잤다. 나는 의도하진 않았지만 학생의 자유권을 존중하는 민주적인 교사가 되었다. 요즘 민주시민교육이 대세라던데 언제나 대세에 따르는 것이 현명한 법이다. 다행히 내일은 부처님 오신날이다. 부처님이 일부러 내 사정을 알고 날짜를 딱 맞춰 오셨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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