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관계의 편집
사람과의 관계는 글과도 같다. 우리의 일생을 책으로 친다면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각자의 이름으로 된 소제목이 있을 것이다. 사람을 처음으로 만나는 날은 그 사람의 이름으로 된 소제목의 첫 문장이 적히는 날일 것이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다면 그 사람과 함께하는 이벤트와 에피소드는 콘텐츠와 소재가 되어 한껏 풍요로운 글을 만들어낼 것이다. 오래 만난 사람과는 다양한 이벤트로 더 많은 글들이 작성되었을 터이니, 어느덧 시간이 지나고 보면 하나의 소중한 책이 되어 버리기 쉽지 않게 될 것이다.
관계를 정리하는 것도 매한가지다. 많은 경험과 다양한 이벤트로 점철되어 한껏 풍부하고 소중해진 그 관계를 끝어내야 할 때가 다가온다면 관계를 끝내려는 그 순간까지 갈등과 아쉬움을 반복적으로 겪을 것이다. 적힌 내용을 통째로 도려내야 한다는 안타까움과 아쉬움 그리고 아직도 더 좋은 방향으로 바꿨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의 여운은 제법 오래갈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집필을 그만두거나, 편집을 하기 참 쉬운 글들이 있다. 아직 많은 글을 쓰지 못해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글들이 그것이다. 관계로 치자면 얼마 안 만났거나,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페이지를 반도 채 채우지 못한 그런 사람과의 관계일 것이다. 혹은 말도 안 될 정도로 망가져서 복구할 수 없음을 실감했거나.
오늘은 관계의 집필을 그만두게 된 일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신입사원 입사 당시, 같은 팀이었던 동기 중 A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나에게 그 소식을 전해준 동기 B는 결혼의 당사자인 A가 조만간 청첩장을 주기 위해서 소규모로 소집을 조금씩 할 거라는 이야기가 있다고 전해주었다. 그러면서 거기에 '너도 올 거지?'라고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B는 조금 더 신나서 뒷 말을 이으려고 했었고, 나는 칼 같이 잘랐다.
"아니, 잘 다녀와."
순간 B의 말문은 막히고, 그러다가 그는 다시 내게 물었다.
"너 진짜 안 갈 거야?"
"응, 나는 청첩장 주는 자리에도 안 갈 거고 굳이 결혼식도 안 갈 거야."
"축의금은?"
"그것도 안 줄 거야."
보통은 그래도 동기이기에 아마 투자의 개념으로라도 서로 주고받는 게 있을 수 있으니, 축의금마저 주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보통은 의례적으로도 5만 원 정도 하는 추세이기도 했고, 그래도 얼굴을 모르는 사람도 아니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친하지 않더라도 이 정도는 그냥 매몰비용 정도로도 지불하는 듯했다.
"진짜로?"
"응, 나는 굳이 인연을 맺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생각보다 엄청 칼 같다, 너."
아예 인연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내가 회사를 들어오고 나서 채운 3년의 글에는 그 사람의 제목으로 써내려 간 글은 기껏해야 두 편 밖에 없었다. 같이 연수를 받았던 같은 팀 사람이라는 것 한 편과 다른 동기와 함께 식사를 한 번 했다는 또 다른 한 편. 그마저도 두 번째는 편은 거의 기억에도 남지 않아, 사실 상 A의 제목으로 된 글은 내게 있어서는 지금 갑자기 한강을 나가 뛰고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 같이 뛰었을 때 적힐 만큼의 동일한 수준이었다. 결국 그 동기는 주변의 사람들이 엮였기에 만들어졌기에 인연이 있었을 뿐, 지금에서는 아주 낯선 A 씨일 뿐이었다.
물론 내가 그 청첩장을 받는 다면 또 다른 편의 글이 채워졌겠지만, 나는 관두기로 했다.
글을 쓰다 보면 이 화젯거리가 얼마만큼의 에피소드를 만들어낼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만큼이나 흥미로울지 대략적인 감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 글이 별로라고 생각했을 때, 글을 지우거나 화제를 바꾸거나 혹은 다른 방식으로 글을 써 내려가곤 한다.
그래서 내가 택한 방식은 '지우기'. 앞으로의 행보에서도 그다지 그럴싸한 내용이 나오지 않아 보이는 그 관계를 끊기로 했다.
그러면 왜 굳이 내비두어도 되고 공백으로 두어 언제든지 채워질 수 있을만 한 영역으로 두지 않냐, 사람일은 모르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글도 관계도 시간을 투자해야 더 깊어지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엉덩이를 오래 붙이고 있는 사람이 양질의 글을 써 내려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글을 써본 사람들은 많은 공감을 표할 것이다. 다시 한번 읽어 바꾸는 글의 구성도, 어딘가 어색한 어휘를 교정하는 것도 시간을 투자하여야만 이뤄낼 수 있으며, 한 번 쓴 글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생각할수록 평소보다 더 만족스럽고 소중한 다음 글을 써내려가기 마련이다.
사람을 만나는 데에도 우리는 언제나 시간을 쓴다. 만나거나 연락도 하지 않고, 시간을 쏟지 않았음에도 나아지는 관계란 없다. 시간을 소요해서 채워나가는 인간관계와 글의 공통적인 기질에서 우리는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한 소재, 그리고 관계를 찾아나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나는 앞으로가 기대되지 않는 화제를 지웠다. 좀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좀 더 다양한 콘텐츠를 채워나가고픈 사람들이 있기에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하는 의례적인 투자와 글 수와 칸 수를 채우기 위해 의무적으로 행하는 글쓰기는 관두기로 했다.
관계는 편집할 수 있다. 어떤 인연으로 서로가 만나 만들어 낸 관계를 이쯤에서 그만두기에는 아쉬움이 있지만(글도 아무리 잘 쓰지 않았어도 내가 쓴 글을 지우기는 아쉽듯이), 향후에 이 어쭙잖은 관계를 계속 유지하다보면 제법 길어져 버렸으나 내실은 많지 않은 글을 더 처리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시작한 관계의 편집, 그렇지만 자명한 사실은 그 사람의 책에도 내 이름은 큰 부분이 아니었을 것이기에, 서로 아쉽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