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남아도는 나만의 시간에 마냥 행복해하다가도, 문득 나만 뒤쳐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50년 가까이 살아온 내 삶에 작용했던 관성의 힘인 듯하다. 개리 비숍의 "시작의 기술"이란 책에 자극을 받고 뭐라도 시도해 봐야 할 것 같아서, 정말 너무나도 갑자기 열무김치를 만들어 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나는 김치 없이 살 수 없는 토종 한국인이다. 학창 시절,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출출함을 느낄 때면, 마침맞게 익은 엄마표 김장 김치를 항아리에서 꺼내, 배추꼬랑이만 칼로 베어 버리고, 고갱이를 손으로 쭉쭉 찢어 밥 숟가락에 푸짐하게 올려놓고 먹었던 기억이 있다. 여름 방학 때 외갓집에 놀러 가면 외할머니는 텃밭에서 갓 뜯어온 열무로 열무김치를 만들어 저녁 상에 올려 주시곤 했는데, 계란 프라이 하나 없이 열무김치와 고추장만 넣고 비빈 밥이 어찌나 꿀맛이었는지 모른다. 곰탕 국물에 깍두기나 총각김치만 있으면 다른 반찬에는 젓가락이 갈 필요가 전혀 없다.
하지만 문제는 여태 내 손으로 김치를 담가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김치는 당연히 시댁이나 친정에서 갖다 먹는 음식이었다. 김치를 담근다는 것은 거의 나의 하루를 투자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회사를 다닐 때에는 시도할 생각 조차 해 본 적이 없다.
이제 열무김치 담그기를 오늘의 미션으로 정했으니 재료를 준비해야 했다. 처음 해 보려니 집에 없는 것들이 많았다. 굵은소금, 찹쌀가루, 액젓, 홍고추, 청양고추, 대파, 생강, 양파 그리고 열무... 고춧가루와 설탕, 마늘, 매실청은 다행히 집에 있었다.
내가 참고하려는 레시피에 열무 3단이 적혀 있길래, 나도 아무 생각 없이 열무 3단을 샀는데, 정말 생각 없이 저지른 참사가 되었다. 계산을 마치자마자 열무 3단은 내가 마트에서 집까지 들고 갈 무게가 아닌 것으로 판명이 되었기 때문에, 남편한테 차를 가지고 와 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다른 문제는 우리 집에 열무 3단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는 대야나 소쿠리가 없다는 것이다. 집에 있는 가장 큰 것들을 꺼냈음에도 여러 개가 동원되어야 했다.
어쨌든 다음의 과정을 거쳐 열무김치는 완성이 되었다.
첫 번째 단을 다듬을 때에는 열무의 무까지 다듬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런데 옆에서 도와주던 아들 녀석이 흙을 털어내고, 껍질도 벗겨내고, 등분을 하는 것이 귀찮았는지, 본인이 먹어 본 열무김치에는 무가 없었다고 주장하길래 인터넷을 검색해 보다가, 안 그래도 열무의 양이 많았기 때문에 무는 과감히 버리는 것으로 합의를 하게 되었다. 무를 잘라 버리니 나머지 두 단을 다듬는 시간은 절약이 많이 되었다.
우습게도 이 과정이 참으로 번거로웠다. 큰 대야와 소쿠리가 없었기 때문에 열무를 여러 차례 나눠서 씻어야 했다. 절인 후에 다시 씻을 것이므로 2번 정도만 씻었다.
물론 이 과정이 초보자에게 가장 어려운 부분이 되겠다.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인 것은 알지만, 정확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지에 대한 감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수시로 가서 체크를 하긴 했으나, 열무가 어느 정도 흐물거려야 적정하게 절여진 것인지를 모르니 그냥 복불복이라는 심정이 되더라.
열무를 절이는 동안 찹쌀풀을 만들고, 분량의 양념 재료를 찹쌀풀과 섞어 믹서에 넣고 갈아 놓는다. 양파는 채 썰고 청양 고추는 어슷 썰어 놓는다.
열무가 잘 절여진 것 같으면 다시 한번 깨끗하게 씻어 소쿠리에 받치고 물기를 뺀 다음, 김치 양념을 넣고 버무리면 된다. 이 과정도 대야가 작아 한 번에 할 수 없었다. 두 번에 나누어 버무리고 통에 다 담기까지 했는데, 싱크대에 있던 또 다른 열무 소쿠리를 발견하고 말았다. 잠시 절망에 빠져 있다가 과감하게 통에 든 김치를 다시 쏟고 낙오되어 있던 열무와 다시 섞었다.
이렇게 해서 비주얼은 맛집에 나올 만큼 아주 그럴듯한 열무김치가 완성되었다. 맛은 모르겠다. 남편이 맛있다고는 하는데, 양심은 있어서 칭찬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는 못하겠고, 처음 하는 건데 이 정도면 됐지 하는 자기 위안만 하는 정도... 엄마네 집에 내가 만든 김치를 갖다 주니 약간 뿌듯한 마음이 생기긴 하더라.
오전 10시쯤 장을 보러 나갔고 김치를 다 만들어 통에 담은 시각은 오후 4시쯤이었다. 생애 최초 열무김치를 완성하는데 소요된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