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 밤하늘의 등뼈
동양도 그렇지만 서양철학에도 깊은 조예는 없다. 그나마 한자는 읽고 쓰기라도.하고, 고전을 중심으로 몇년간 전문 공부 맛이라도 봤지만, 서양철학은 내 스스로의 흥미 본위 내지는 지적 허영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짧은 시간, 그 유명한 이진경 선생의 철학과 굴뚝청소부를, 달마다 너와 함께 쪼개 읽던 젊은 시절이 불현듯 기억난다. 돈도 없는 주제에, 너의 관대함에 기대어 차와 술을 얻어마시고, 아는만큼 먼저 읽고 해석해서 알려주던 시절이었다. 어쨌든 윌리엄 거스리의 희랍철학입문은 아직 가지고 있다. 대단히 얇은 책이지만, 제대로 읽으려면 한 해도 모자라다. 단순히 옛날식 번역 말투가 어려워서라기보다, 서양 철학의 기초와 효시를 가능한 모두 다루며 핵심 개념만 압축하니, 나처럼 문외한은 읽기 어렵다.
왜 철학을 공부하는가? 세상을 읽어내고 그와 관계하는 나 스스로를 알고 싶어서이다. 하이데거는 이 세상에 던져진, 피투성이의 피투성彼投性을 지닌 인간을 보았고, 키에르케고르는 버림받았을지언정 아득바득 신 앞에 다시 서는 단독자로서의 인간을 보았다. 캡틴 아메리카는 원래 브루클린의 약골 청년이었지만, 늠름하고 웅장한 애국심을 지녔고, 미스타 세이건은 어렸을때부터 스타 Star 대신 별들을 선망하던 소년이었다. 그는 자신이 별과 우주에 관심을 가질 때, 부모님이 그를 격려하고, 시대 또한 그에 걸맞게 발전해 다행이라 한다.
이 장은, 올해 가을 9월부터 겨울 12월 초에 이르기까지 악전고투하며 유독 오래 머물렀던 장章이었다. 유달리 어렵거나 이해가 힘들어서는 아니다. 코스모스의 내용들은 어차피 모두 어렵고 이해 또한 쉽지 않다. 일단 가을 들어 수확하듯 회사가 바빴다. 회사의 일은 매해 큰 줄기가 달라지지 않지만 회사에서 여력을 얼마나 소비하냐에 따라 책 읽을 때 집중도가 달라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이 장이 유독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물가물해지려 할때마다 여러번 되짚어 읽느라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사실, 이 여섯 번째 장은 어쩌면 코스모스라는 위대한 여정의 책에 가장 맨 처음에 나와야 되지 않나 싶다. 가만히 보니 코스모스는 일단 지구가 어떤 행성인지 먼저 조망하고, 이어서 지구의 주변 행성 환경을 차례차례 이야기해준 다음, 그 다음 갑자기 중간쯤 들어서 미스타 세이건의 유년시절을 중심으로 왜 한 인간이 우주에 관심을 가질수밖에 없는지, 우주에 관심을 갖는다는건 지구의 실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종-횡 양쪽의 각도에서 모두 역사를 기술하듯 설명해주고 있다. 미국의 어린 소년이었던 미스타 세이건이 별에 관해 호기심을 갖던 이야기는, 옛 인류가 불과 함께 별에 관심을 가질법햇던 선사 시대 이야기로 넘어가고, 다시 여러 섬과 가치관으로 구성된 이오니아의 여러 철학자, 과학자 등을 차례차례 소개하며 인간의 과학이 어떻게 발전하고 이 과학이 다시 어떻게 우주를 읽어내며, 사회를 추동하고 정체시키는지 재미나게 소개한다. 단언컨대 코스모스의 장들 중 그나마 가장 읽을만하고 이해가 쉬운 장은 바로 이 곳이다.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데미스토클레스, 피타고라스 등 우리가 플루타크 영웅전에서도 알법한 위대한 서양의 초기 철학자들은 과감히 생략하기로 한다.
왜 우주에 관심을 갖는 일이 지구인에게도 중요한가? 미스타 세이건은 놀라운 시각을 제시한다. 천문학을 통해 우주에 관심을 갖는 일은, 이 거대한 우주에서 지구와 지구인의 위치를 명확히 깨닫는 일과 같다고 한다. 이는 곧 지동설, 그리고 성경으로 대표되는 지구 중심주의를 깨겟다는 말과 같다. 미스타 세이건의 주장에 의하면, 천문학이 발전하여 지구와 지구인의 위치를 객관화시킬수록, 지구 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는 꺠질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로부터 파생된 계급 투쟁, 인종 차별 등의 많은 모순도 좀더 평등한 시각으로 다시 조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 일리 있는 얘기다. 고대로부터 계급의 상위를 차지해온 이들은, 맑스 식으로 표현하자면 생산수단과, 그로부터 파생된 잉여를 손쉽게 차지한 이들이었지만, 그들에게는 한편으로 '하늘이 내려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저 먼 미지의 권위자들이 분명히 있었다. 나는 술은 못 끊었을망정,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 미스타 세이건이 공박하는 하늘과 인간 중심의 종교관이 무엇인지 알고, 그를 부정할 마음은 없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서 그가 가진 지식이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리라는 사실 또한 안다.
말미에 잠깐 다른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다. 요한복음에서, 날때부터 오랫동안 눈이 멀었던 이를 두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쭈었다. 주여, 이 자는 무슨 죄를 지어 날 때부터 눈이 멀었습니까? 이 자의 죄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입니까? 당시 장애나 난치, 불치병 등은 처벌받아야하는 죄 때문에 짊어진 것이라는 추론이 팽배하던 고대였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죄도, 그 부모의 죄도 아니며, 단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말씀을 하시있다. 훗날 사도 바울은 덧붙여, 그릇 하나도 옹기장이가 마음대로 그 용도를 정하는데, 사람을 만든 주님이 각 사람들에게 어떤 삶을 지워줄지는 단연코 주님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진흙으로 그의 눈을 감싸주신 뒤,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 하셨고, 이어서 그는 단번에 나았다. 우리는 이처럼 갑작스러운 계시, 예수님의 은총, 치유를 늘 바란다. 혹은 꼭 예수님이 아니어도 좋으니,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도움을 간절히 원할때가 있다. 그러나 종교를 믿는다고 해서, 언제나 비현실, 초현실적인 해결법을 원하는게 아니다. 소경에게도 '믿음' 이 있어야 했고, 실로암 연못까지 가서 스스로 눈을씻는 수고를 겪어야 했다. 그가 만약 '진흙 하나 물에 씻는게 무슨 소용이야.' 라면서 다른 연못으로 갔거나 그냥 진흙을 털어버렷다면 어쩌면 이 기적은 기록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계속해서 책을 읽는다. 계속해서 내가 모르는 걸 알고 싶다. 그러나 그 지식이, 결코 내 신앙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믿음이란 원래 그렇다고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