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이 주요 가치가 된 시대에 '성숙'이 주는 가치
Product Manager라는, 그토록 바라던 직무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다.
그리고 PM이란 직업 자체가 아직은 한국 사회에서 많이 생소하고, (비록 일 자체는 과거부터 존재했으나) 이 직무명이 각광 받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흐름을 보았을 때, 20년 가까이 되는 고연차 선배들께 일을 차근차근 배우며 깨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은 매우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 분들이 일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큰 영감을 받는다.
주니어 PM으로서 비교적 시행착오를 덜 겪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이미 그 일을 능숙하게 잘 하고 있는 다른 선배들을 보는 것이다. 스스로 맨땅에 헤딩하며 '내 것'을 찾아가는 것도 의미 있지만, 이미 좋은 본보기가 있다면, 그 모습을 잘 관찰하고, 분석하고, 나의 일에 적용시키려는 노력을 한다면 성장 속도에 부스터를 달 수 있다.
운 좋게도 나는 5~20년 경력의 선배 PM 분들 사이에서 일하고 있다.
이미 기본기가 탄탄한 직장인 선배들 사이에서 그 분들의 단어, 화법, 이메일 작성, 회의 진행하는 것까지 하나하나가 큰 인사이트가 된다. 저연차에는 선배들을 쉐도잉하는 것이 빠르게 성장하는 발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주니어 PM에게 공통적으로 제공되는 것은 아님을 알기에, 내가 잠시나마 선배 PM 분들을 보며 배운 점을 브런치에도 공유해보고자 한다.
사실 요즘 사회 분위기에서, 특히나 스타트업 업계를 경험했던 나에게 '성장'은 거의 절대적인 가치였다.
성장하지 않는 기업은 도태되고,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만들어 내야만 했다.
그렇게 나는 '성장'을 거즘 정답으로 생각하고 살아 왔다.
원하던 직무로 취업해 일할 기회를 잡기만 한다면, 나는 그때부터 성장의 궤도를 경주마처럼 달리겠다는 마음의 준비를 한껏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회사 입사 후, 내 머릿속에 가장 많이 남았던 단어는 '성숙'이었다. 성장만큼 중요한 것이 성숙이고, 성숙 없는 성장은 급격한 추락을 맞이할 수도 있단 것을 알게 되었다.
회사에서 만난 많은 분들은 주로 '성숙했다'.
나의 미성숙함을 자주 느끼며 부끄러웠고, 성숙한 어른이 되기 위해서 나는 어떤 노력을 해야하는지 고민하게 됐다. 그리고 아래 내용은 내가 회사를 다니며 느낀, 성숙한 사람의 특징이다.
최근 우리 팀은 전사적으로도 그동안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프로젝트를 담당해야 했다. 나의 사수님들은 그 프로젝트의 리드로서 얽혀있는 전사 각 도메인에 업무 요청을 하고, 외부 협력자 분들과 이슈 조율을 하며 짧은 기간 내에 엄청나게(..) 많은 이해관계자들을 설득하고 소통하면서 프로젝트를 리드해야 하는 무거운 미션을 받았다.
대외비로 외부에 말할 수는 없지만, 팀 내부인으로서 나의 사수님들을 보면 소위 억울할 상황도 많았다.
위에서 정해져서 내려오는 마감기한과 목표들이 있었고, 잦은 변경 또한 우리로부터 시작된 내용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프로젝트 리드는 PM이기 때문에 우리 팀에게 온갖 질문이 쏟아졌고, 어떤 때는 날선 분위기를 견뎌야 하기도 했다. 내 의도가 아니었고, 나조차도 한 치 앞을 확답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나의 사수님들은 억울해하기보단 리더로서 사람들에게 최대한 맥락을 설명하고, 질문에 성실히 답변하였다.
그 과정에서 "위에서 하라니까 해야죠."라는 힘빠지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이러한 맥락을 전달해야하는 상황에서는 '까라면 까'라는 식의 표현보다는, 회사에서 방향성이 바뀌는 것은 실무자들 입장에서는 힘든 일이긴 하지만, 이러이러한 이유로 급작스레 리더십에서 변경사항이 내려왔다며 완곡하게 실무자들에게 상황을 전달했다.
'담당자'로 나의 이름이 박혀 있어 모두가 내게 질문하지만, 나 역시도 해보지 않았고, 잘 모를 때 느끼는 중압감은 정말이지 무겁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무게를 짊어지기로 결심하고, 회피하지 않고 해결해나가는 태도가 성숙함이라고 생각했다.
프로젝트가 끝난 후, 팀끼리 소소한 대화 자리를 가졌다. 나는 신입으로 입사해 잘 모르긴 하나, '원래 프로젝트가 이렇게까지 힘들고 급박하게 돌아가나?'라는 의문이 드는 상황이 자주, 아니 매일 발생했다. 팀원들끼리의 뒷풀이 자리에서 사수님은 "오랜 기간 회사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경험했지만, 그 중에서도 이번 프로젝트는 '어나더 레벨'이었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들으며 속으로 조금 놀랐다.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이상한 정도로 빡세긴 했지만, 사수님들이 노련하게 핸들링을 잘 하셨고, 힘든 와중에도 프로젝트는 목표 기간에 맞춰 론칭했기 때문에 그 분들의 연차와 실력에서는 어느 정도는 감당 가능한 프로젝트였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말 그대로 잘 끝났기 때문에 꺼낼 수 있었던 이야기들을 듣다 보니 울컥할 정도로 몸과 마음을 갈아 넣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았음에도 겉으로는 불안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선배들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 말이 PM이 아주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하고, 언제든 강한 모습만을 보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PM은 프로젝트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매니저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PM이 조급하고 초조한 태도로 메이커들을 대하면 그 감정이 고스란히 전이된다. 그러면 메이커들은 본인이 해야 하는 본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매니저의 불안함을 완화시켜주기 위해 나의 업무 우선순위를 바꾸거나, 보다 솔직하게 대화하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이미 사회에 본인의 정신건강을 해칠 정도로 일하는 사람이 많고, 환경적 압박도 무시할 수 없는 만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 성숙하다고 말하는 게 조심스럽다. 하지만 나 스스로가 불안하고 조급한 감정을 드러냈던 상황이 있었기 때문에 이 점이 나와 대비되는 선배들의 성숙함이라고 생각했다.
신입 시절, 나는 선배들에게 많이 혼이 났다. 다양한 방면에서 미숙했고, 지적도 굉장히 다채롭게 받았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감사하게도 나의 선배들은 내게 피드백을 '해주었다'. 보통은 본인의 일이 너무 바빠서,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아서 부정적인 말은 안 해주기 마련이다. 그리고 뒤에서 쑥덕거리는 상황이 생기는데 나의 선배들은 부족한 나에게 고칠 점들을 이야기해주셨다.
업무 스킬적인 부분부터 작지만 확실하게 생산성을 높여주는 꿀팁들, 그리고 비즈니스 매너와 상사를 대하는 커뮤니케이션까지 다양한 면에서 피드백을 주었고, 내가 그 피드백을 못 받아들이는 것 같을 때엔 추가로 말하기보단, "결국 본인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며 말을 줄이셨다.
그리고 당시에는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으나, 점차 나의 미숙함을 인정하면서 이전에 내가 튕겨냈던 조언들을 내가 직접 다시 꺼내어 곱씹었다. 선배들이 좋은 선배로 '보이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고, 정말로 '좋은 선배'가 되는 용기를 내어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게 됐을 때, "아! 나 조금 성숙해졌구나." 생각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여러 난관에 부딪쳤고, 힘든 시간을 견뎌내었다.
지금은 이전보다 많이 성숙해졌다고 느낀다. 나의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계속해 채워나가는 것,
그렇게 걸어나가다보면, 시간이 지나 그 시기를 잘 견딘 나를 장하게 생각해주는 미래의 내가 있지 않을까.
직장을 다니면서 '성장'하고 싶었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성숙'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