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날, 원래 이날 예정된 일정은 자연사 박물관 뿐이였는데 약간 고민했던 곳을 방문하기로 했다. 영화 '노팅힐'의 '그 서점'이 있는 그 곳. 노팅힐과 그 곳에서 열리는 포토벨로 마켓. 토요일에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데 이 날이 마침 토요일이었고, 자연사 박물관 예약은 오후 1시였으며, 우리는 모두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이 곳은 우리 숙소에서 가까웠고, 한번에 가는 버스가 있었다. 안 갈 수가 없었다는 뜻.
사실 미디어에 나온 곳을 찾는 것을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그래서 망설였다. 굳이 뭘, 대단히 좋아하는 영화도 아닌데.
그런데 웬걸. 내 아이들이 그 로맨틱했던 현장에, 이렇게 따사로운 햇빛 속에 함께 있는 걸 본 나는 정말 감격해버리고 말았다. 나머지 식구들은 나의 감격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노팅힐을 나만 봐서 그렇다. 공감할 사람이 없었음에도 이 장면에 대한 감동은 오래갈 것 같다.
노팅힐과 그 서점에 대한 감동은 나에 비해 미약했지만, 다른 식구들도 포토벨로 마켓은 잘 즐기고 있었다. 런던의 3대 마켓이라더니 정말 다양한 물건들이 길에 나와 있었다. 큰애는 런던 글자가 박힌 캡을 하나 샀고, 둘째는 유니언잭이 박힌 쿠션커버(왜?)와 자수정(왜?)을 샀다.
런던의 마켓이 즐길 만한 것은 겁냈던 것보다 물가가 많이 비싸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모자와 쿠션커버는 10파운드씩이었으니 환율을 넉넉히 잡아 18000원 정도였고, 길에서 파는 주전부리도 식당 물가에 비해선 전혀 비싸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들 원하는 것을 하나씩 골라잡고 유쾌하게 다음 일정으로 나설 수 있었다.
사실 여행 기분은 날씨가 다할 때가 많은데, 이날 날씨가 정말 째졌다. 사실 첫날 이슬비 외에 우리는 런던에서 비구경을 못했다. 런던 날씨가 궂다고? 글쎄, 아마도 여름을 제외한 날씨인 것 같다. 아니면 내가 날씨요정이거나.
날씨 요정 얘기를 좀 해보자면. 사실 나는 우리집에서 날씨요정으로 통한다. 여행 일정이나 계획을 주로 내가 짜는데, 대체로 날씨가 좋은 편이다. 처음 몇 번 정도는 그냥 내 주장이었는데, 이제 식구들이 거의 세뇌됐다. 특히 거의 일주일 이상 비가 오지 않은 이번 여행 덕분에 나는 날씨요정으로서의 입지를 탄탄하게 굳힐 수 있었다. 그래서 슬리피언 날씨요정설을 이제 좀 뻔뻔하게 말할 수 있게 됐달까. 뭐, 우리집에서야 뭘로 통하면 누가 뭐라겠는가.
뻔뻔한 날씨요정의 다음 일정은 자연사 박물관. 숙소였던 패딩턴과 가까운 위치였다. 여름 런던에 가실 분들은 가급적 관광지 예약을 꼭 하고 가시길. 박물관, 미술관 등 무료인 관광지가 많지만, 예약하지 않았다면 줄을 서야 한다. 줄 서는 곳에는 그늘이 별로 없고, 성수기엔 사람이 많아 줄을 오래 서야 한다.
이타적인 많은 블로거들의 정보 덕분에 우리는 예약했고, 쉽게 입장했다. 자연사 박물관은 로비에서부터 우리 눈을 사로잡았다.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의 실제 무대라고도 하는 이 곳에는 다양한 생물 표본, 거대한 화석 등이 넘쳐난다. 수 년전 비엔나 여행 때 영어, 독어를 하나도 모르면서도 황홀한 한때를 보냈던 둘째를 위해 준비한 일정. 역시 둘째는 "하루 종일도 있을 수 있다"며 신이 났다.
문제는 더위. 런던에는 실내에 에어컨이 설치돼있지 않은 곳이 꽤나 많다. 그래도 미술관은 작품 때문인지 에어컨이 있던데 자연사박물관과 영국박물관에서는 에어컨이 없는 공간이 제법 되는 것 같았다. 나랑 큰애는 좀 빨리 나가보려고 빠른 걸음으로 막 돌아다니는데, 둘째는 더위도 잊은 듯했다. 결국 곤충관을 못보게 하려던 큰애의 농간은 실패하고, 우리는 한참이나, 이 공간에 더 머물러야 했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걸. 런던 대중교통엔 에어컨이 없다 photo by 남편
여름 런던은 아름답지만, 직사광선이 따갑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피난처로 여길 대중교통에 에어컨이 없다! 런던 지하철이 너무 오래됐고, 지하에 전기선이 너무 많이 파묻혀있어 에어컨은 못 단다나? 그럼 버스는 왜? 이층버스에 올라탔다 정말 쓰러질 뻔했다. 가이드님 말로는 지하철에선 진짜 기절하는 경우도 있다고. 암튼 우리 식구들은 에어컨 있는 숙소를 물색한 나를 찬양할 수밖에. 이번 여행에서 나는 아무래도 날씨 요정이 될 운명이었던 것 같다.